2025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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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도 눈치·침묵·미소의 인간적 소통 필요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29. 소통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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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답과 완벽함만을 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상대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인간다운 소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챗GPT 제작


학창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어머니가 꼭 묻곤 하셨다. “밥 먹었니?” 나는 얼른 “아, 네, 먹었어요”라고 대답했지만, 이내 밥상이 차려지곤 했다. 서로의 속마음을 ‘눈치’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눈치만 있어도 굶어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눈치는 단순한 재치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섬세한 감각이다. ‘아니요’라고 말하면 매정하게 들린다. 그래서 ‘글쎄요’ 하며 웃거나, 곤란할 때 침묵을 지켜도 우리는 금세 그 의미를 알아챈다. 미소와 침묵 속에는 ‘미안하다’ ‘곤란하다’ ‘불편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살피며 건네던, 우리의 신중하고 다정한 소통 방식이었다.

동양의 전통은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 도교 사상은 세상 이치를 흑과 백, 옳고 그름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씨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씨가 되듯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된 흐름 속에서 이해되었다. 우리말에 “좋아 죽겠다”와 “싫어 죽겠다”가 공존한다. 기쁨과 고통, 사랑과 미움이 분리되지 않고 얽혀 있다는 삶의 깨달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언어와 소통은 단순한 논리보다는 맥락과 관계를 읽는 데 무게를 두었다.

예전부터 ‘말’은 중요했지만, 지나친 말수는 경계했다. 말보다 글, 글보다 마음을 중시했고,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뜻을 알아듣는 섬세함이 존중되었다. ‘글쎄’ ‘그럭저럭’ ‘그저 그렇다’ 같은 표현도 명확한 결론을 서두르기보다 관계를 조율하는 지혜였다. 전통적 소통은 얼핏 우유부단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계 속에서 상황을 읽고 ‘우리’라는 공동체적 시각에서 판단하고 조율하며 배려하는 인내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방식을 낯설게 만든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왜 확실히 대답하지 않지?’ 하며 답답해한다. 반응이 없으면 곧바로 거절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 우리의 언어는 신호등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파란불-빨간불’ 신호에 익숙해져 간다. On 아니면 Off, 1 아니면 0. SNS의 ‘좋아요’ 버튼, 메신저의 ‘읽음’ 표시는 명확한 반응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응답이 늦으면 불안해지고, 애매한 답변에는 짜증을 낸다.

물론 이런 단순화 덕분에 소통은 빨라지고 효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관계 속 미묘한 마음 읽기, 느리지만 정교한 배려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사랑을 ‘예’라고 확인해야만 안심하고, ‘좋아요’가 아니면 곧바로 ‘싫어요’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이런 문화 속에서 관계의 여백은 점점 좁아진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단순한 On/Off가 아니다. ‘아니요’ 같아도 다시 ‘예’로 바뀌고, ‘좋아요’였다가 ‘싫어요’로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관계는 성숙해간다.

한류가 세계로 뻗어 가는 지금, 우리는 전통적 소통방식에서 배울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특히 모든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구분하려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그렇다. 단정적 논리보다, 관계와 맥락을 읽어내는 배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희미한 신호 속에 담긴 진심.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소통이다.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 디지털 속에서도 “밥 먹었니?”라는 질문 뒤의 온기를 읽고, “괜찮다”는 말 속 괜찮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섬세함. 극단이 아닌 경계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힘. 효율성과 인간다움, 속도와 깊이 사이에서 만들어가는 조화로운 문화.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소통의 언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어린이집에서 사목하는 한 수녀님은 말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을 공감해주기만 해도 서럽게 울다가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고요. “네가 그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데 친구가 안 줘서 속상했구나.” 이렇게 마음을 읽어주기만 해도, 아이의 얼굴은 금세 환해집니다.

사실 우리 소통의 근원에는 단순한 예/아니오가 아니라, 마음을 읽고 기다려주는 느림과 인내가 깃들어 있습니다. 서둘러 반응하기보다 마음의 결을 헤아리고, 때로는 침묵하며 기다려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필요를 배려할 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빠릅니다. 카톡 메시지에는 즉시 답장을 보내야 하고, 연인 사이엔 버튼 하나로 사랑을 확인하며, 마치 기계처럼 즉각적이고 명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존재입니다.

한 발짝 물러서 느림을 선택할 때,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진정한 공감과 배려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깨닫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기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품고 나누는 영성적 존재라는 것을요. 이렇게 우리가 나누는 모든 말과 침묵 하나하나가 영혼의 깊은 울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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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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