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로 진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비단 20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주변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폭력이 우리 일상을 위협함에도 사람들은 무관심할 뿐 아니라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폭력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가 하면, 가해자 또한 의식하지 못한 채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법적 처벌 또한 솜방망이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아렌트는 이러한 폭력의 근본 원인을 흥미롭게도 인간의 ‘사유 부재’에서 찾는다. 그녀는 폭력과 ‘무사유’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있으며, 사유가 결핍된 사회는 모든 악을 합한 것보다 더 큰 파멸과 폭력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우리 일상에 파고드는 악의 폭력성은 사실 전혀 특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폭력이 아렌트의 주장처럼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면 왜 우리는 폭력을 피하고자 정상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아렌트가 주장하듯이 인격적 대화의 장인 ‘공적 영역’보다 비인격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적 영역’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도 한몫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어의 오용’ ‘타인에 대한 공감의 부재’ ‘권력에의 맹목적인 복종’이 우리가 올바른 사유를 하는 데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가운데 사실을 왜곡하는 언어의 오용은 사람들이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감의 부재와 맹목적인 복종을 일으키는 전제로 작용해 폭력을 은폐하고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이런 일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자주 정치적 목적을 갖고 언론의 힘을 빌려 행해지곤 한다. 언어 오용의 심각성은 다름 아닌 폭력적 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사람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개인 혹은 다수에게 끔찍한 집단적 폭력을 행사하게끔 만든다는 데 있다. 언어는 상징과 의미 부여를 통해 일정한 표상을 만들며, 잘못된 표상은 현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폭력을 은폐하고 조장하는 언어의 오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인격적 대화의 공적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자유로운 의사 표시가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격적 대화와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이 발휘되는 사회일수록 폭력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가 단절된 채 권력에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행위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폭력의 시대에 맞서 이를 경계하고 깨어있어야만 한다. 올바로 사유하고 판단할 때 비로소 폭력은 근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의 주장처럼 인류는 ‘폭력을 인식하는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