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꾹 예언자는 3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예언서에서 당시 예언자들과 백성들이 크게 고민하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께 기도하여도 왜 응답을 주지 않으십니까? 왜 세상에는 불의와 폭력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왜 멸망합니까?
제가 젊었을 때는 세상이 당연히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생각도, 사회와 인류의 의지도 경험을 통해 더 지혜롭고 풍요롭고 너그러워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젊을 때는 이상과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던 이들이 어른이 되면 개인적 욕심에 빠지는 경우를 보고,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 차원의 갈등이 커지고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습도 보면서, 세월이 지나간다고 발전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망이고 충격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로 답하십니다. 첫째로, 환시 즉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지체하지 않는다. 둘째로, 악인의 뻔뻔함은 잘못된 것이며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악인은 멸망할 것이니 그의 뻔뻔함은 부끄러움과 후회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에게 필요한 것은,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며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라고 하는 이 말을 여러 번 인용하는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라고 인용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믿는 이들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에 힘입어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모두 순교했지만, 주님의 구원은 언제나 올지 모르겠고 박해는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조급함과 불신을 버리고 믿음으로, 성실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런 믿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하는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권하는데 왜 세상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 배격할까? 실망하고 지쳐서 외로워지고, 부끄러워서 도망치거나 포기하고 싶어질 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작은 씨앗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일을 합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오겠습니까? 우리가 성실히 일하면, 하느님의 뜻은 예정된 때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실망시키고 괴롭히는 것은, 우리의 조급함이요 불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놀라운 순간들은 잠시간에 지나가고 여전히 부족한 현실에 머물러있는 나 자신과 우리를 보면서 실망하고 의심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여 성실히 함께 걷기 힘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낸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지고,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선명하게 본다고 하였습니다.(1코린 13 참조)
아주 작은 사랑과 아주 작은 믿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사랑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예수님은 말해주십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과 사랑을 늘 주시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