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의 인간을 ‘성과(成果) 주체’로 규정한다. 성과 주체는 스스로 과잉 긍정과 과도한 성과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에게 강제하는 ‘역설적 자유’에 자기를 내맡긴다. 성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발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과 주체’는 자신을 스스로 닦달함으로써 항상 피로하며, 결국 탈진(burnout) 상태에 이르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1855~1936)는 인간 사회를 ‘결합 지향의 의지 구조체’로 보고, 그 관계 맺음의 방식에 따라 실제적이며 유기체적인 구조의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념적이며 기계적인 구조의 ‘이익사회’(Gesellschaft)로 구분한 바 있다. 공동사회는 자연적인 ‘본질의지’(Wesenwille)에 기반한 사회이며, 이익사회는 합리적이며 의식적인 ‘선택의지’(Kürwille)에 기반한 사회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이익을 합목적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이익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현대 이익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은 그 사회가 원하는 목적에 부합한 자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회 안에서 구성원 각자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최고의 성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성과 주체’는 바로 이러한 이익사회의 결과물이며, 자율적 주체의 ‘할 수 있음’은 무의식적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기암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이익사회에서 벗어나 친교와 나눔과 봉사로 결속된 탈목적적 사회인 공동사회, 즉 ‘공동체’(communitas) 삶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공동체 삶은 ‘열매 주체’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공동체 구성원은 이익사회의 ‘성과 주체’와 다르게 자기의 고유한 인격을 통해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고유의 소명 의식을 갖고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무엇보다 구성원 모두가 자율적 존재로서 개별 인격의 고유성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가운데서 드러난다. 이때 각 개인의 고유한 역할은 신약 성경의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에서 보듯이 각자의 ‘천부적 재능’(talentum)과 관계가 있다. 탈렌트의 비유는 ‘열매 주체’로서 삶의 중요성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열매 주체’의 삶은 인간 실존의 ‘본래성’과 ‘천부적 재능’에 기반해 자기 역량을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성과보다는 그 과정과 열매를 중시하는 삶을 의미한다. 성과를 통해 평가받는 이익사회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엄밀하게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과정이 아닌 성과에만 집착하는 성과 주체의 삶이 그 자체로 충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 사유를 위한 터로서 ‘트임’(Lichtung)을 강조한 바 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어두운 숲길에서 만나는 빈터는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빛이 들어오는 터이기도 하다. 성과의 집착에서 벗어나 잠시 사유를 위한 여유를 가질 때 우리의 소중한 삶 자체가 바로 열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