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가족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가정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성도 달라졌다.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깊은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삼대가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상담이 필요해요. 여덟 살인데 아직도 엄마와 하루도 떨어져 있지 못해요.”
할머니 Y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부재중인 며느리를 대신해 손녀를 하룻밤 돌보던 그는 아이가 틈만 나면 ‘엄마’를 찾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처음에는 인내하며 달랬지만, 아이가 계속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 하자 어느새 화가 치밀어 “전화하지 마라”고 제지했다고 한다.
아이에게 엄마와의 분리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다. ‘엄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의 순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뒤따른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불안을 마치 자신이 거부당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감정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적절한 거리를 잃은 순간이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대에게 빠져든다. 몰입이 깊어지면 관조보다는 개입이 많아지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잦아진다. 이러한 몰입이 감정적 압박으로 이어지고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이 아니라 ‘하는 것’(act of loving)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빠진다’는 것은 통제력을 잃고 휩쓸리는 상태다. 거리와 경계가 사라지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구속하는 의존적 관계가 되기 쉽다.
상대와의 관계에서 경계를 잃는 현상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빠져 결국 익사했듯 자신에 대한 집착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할머니가 손녀의 불안을 공감보다는 거부로 받아들인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오늘의 디지털 문화는 이런 몰입을 더욱 증폭시킨다. 손 안의 화면과 나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경계도 희미해진다. 정보의 흐름에 반복적으로 반응하면서 자기 확신에 갇히고, 때로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종교나 정치 집단에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현상 역시 비슷하다. 지도자나 교리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사라지면, 관조 없는 몰입이 확증 편향의 늪으로 이어지기 쉽다.
곧 명절이다. 가족은 누구보다 가깝고 사랑스럽지만,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감정적 부담과 무언의 압박도 함께 따른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상처는 ‘사랑의 거리’를 잃은 결과이기도 하다. 서로의 삶의 방향이나 일상적 선택에 과도하게 개입하거나, 독립적인 영역까지 규정하려 드는 태도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때로는 억압이 된다.
사랑의 거리를 재는 기준은 존중이다. 상대가 나와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부탁할 수는 있어도 강요할 수는 없다. 상대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사랑을 지탱한다.
이 거리는 무관심이나 단절과 다르다. 가족이 넘어져도 즉시 일으켜 세워줄 자리는 아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 주되,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서 있으면서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존중과 사랑의 적정거리다.
가족 관계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와 사회적 관계에도 이 거리는 필요하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한 발 물러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몰입 속에서도 자기 존재를 지킬 수 있다. 숨을 고르듯 거리를 두면, 사랑은 더 깊고 안정적으로 흐른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은 거리를 두되 멀어지지 않는 이 미묘한 균형 속에 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존중이며, 그 실천은 사랑의 거리두기에서 시작된다.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곧장 “가까이 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고 당부하셨지요. 이는 무심히 다가가려는 마음을 멈추고, 경외와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우리도 사랑이 깊을수록 서로에게 필요한 거리가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먼저 한 발 물러서고, 하느님이 지으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며 존중하려는 마음이 필요하지요. 때로는 신발을 벗듯 내 힘과 고집을 내려놓을 때, 그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거룩한 만남의 공간이 됩니다. 이번 명절, 사랑하는 가족을 마주할 때 하느님 작품을 바라보듯 그런 영성의 거리에서 마음을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