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기도 성월’이요, ‘전교의 달’인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며칠을 지내면 11월 ‘위령 성월’을 맞이합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라고 말씀하면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살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고백 말씀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묵주 기도 성월’을 되돌아봅니다.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그리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위령 성월’ 동안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그때를 준비하는 시간을 보낼 결심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신을 굳세게 해 주셨기’(2티모 4,17 참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의 삶의 태도, 삶의 모습에 대해 복음은 일깨워줍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질이나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으며, 세금을 포탈하거나 착복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다면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이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삶을 살아왔던 바리사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그 세금을 포탈하고 착복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바리사이일까요, 아니면 세리일까요? 우리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태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는 혼잣말로 기도를 합니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참조) 기도를 합니다. 더욱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났습니다’(루카 18,11-12 참조)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랑을 늘어놓고 싶어 합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루카 18,13 참조)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낸 채 자기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아룁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솔히 자기 성찰을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고,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잘난 척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경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라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데 너는 왜 못하니?’라는 판단과 단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바리사이와 세리 중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길에 있어서는 바리사이처럼 해야겠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세리처럼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었다면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로 보내주신 누군가가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협력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