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장자(莊子) 잡편(雜篇)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우화가 있음을 후에 알게 되면서 복음과 동양의 고전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새삼 확인하였다.
살면서 가장 괴로울 때 중 하나가 자기가 한 일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일 것이다. 혹은 자기가 이뤄놓은 일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릴 때일 것이다. 자기가 이룬 업적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고 욕심이 생겨 열정이 과욕이 되고,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 도리어 큰 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져 서글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져 자신감을 잃게 되며, 나를 찾는 사람이 없어지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큰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란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임을 배우는 학교가 아닐까.
함께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한 수녀님께서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운 순례 여정 중이셨는데, 문득 클라라 성녀께서 선종하신 침대의 소박한 모습을 보고 희망과 자유를 느끼셨다고 했다. 진정한 희망이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집착을 버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없어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초라한 나이지만, 그런 나를 눈여겨보시고 마음에 두시는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요즘 가장 작고 약한 것을 마음에 두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종종 묵상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장 약한 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다.
가장 작고 약할수록 가장 큰 돌봄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이는 ‘이념’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가장 작고 약한 것을 볼 때 연민을 느끼며, 지켜주고픈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태아를 보며 나도 태아였던 때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무기력한 존재, 돌봄 없이는 생명의 위협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들어 죽기까지 끊임없는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도 인간의 모든 것을 경험하셨다.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돌에 맞아 사라질 뻔하셨다. 구유에 누워 계실 때 온갖 위협에 노출되셨고, 헤로데의 폭정으로 희생당할 뻔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 이, 가난하고 병든 이에게 다가가셨다. 가장 작고 약한 이들을 돌보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힘없는 존재를 돌보라고 우리에게 생을 허락하셨다. 우리 생은 아주 작고 미약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아주 미약한 상태로 마감한다. 힘이 있고 건강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우리의 과거요 미래요 현재의 모습인 가장 작고 약한 이를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여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