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정하고 후회하며 미안해하는 시간은 곧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지난 추석 묘소를 찾아 성묘하는 가족들. 뉴시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이기 때문에 서툴고, 그 서툶이 오히려 너그러움으로 용서가 된다.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어 가슴에 시린 흔적을 남긴다. 첫 직장에서는 떨림과 미숙함 속에 실수를 연발하며 자신감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첫사랑이 지나면 다음 사랑이 찾아오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사랑을 배운다. 첫 직장의 미숙함도 어느새 익숙함으로 바뀌면서 자신감을 되찾는다. 모든 ‘처음’은 이렇게 되풀이 속에서 익숙해진다.
그러나 세상에는 연습할 수 없는 ‘처음’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죽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앞서 겪어 가르쳐 줄 수 없기에 배울 수도 없다. 모두가 초보자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 죽음이다.
다행히도 우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하지만 그 죽음은 언제나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어, 매번 처음처럼 낯설고 두렵다. 그 어두운 터널의 첫 관문은 ‘부정’이다.
“그럴 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부정은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희망의 마지막 절규이자 부서질 듯한 충격을 붙잡아주는 완충재다. 그렇게 버텨내다가 서서히 올라오는 죄책감. “아, 내가 그때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뒤늦은 후회와 미안함이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지만, 그 아린 가슴을 부여안으며 견뎌낸다.
어머니는 15년 전 폐암 말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죄책감이 불쑥 고개를 든다. “그때 조금만 더 준비를 잘했더라면?.” “그 말을 꼭 해야 했는데?.” 기일이 다가오면 가족이 모여 연도를 바치고, 음식을 나누며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있다.
죄책감은 단순히 잘못했다는 사실을 넘어, 평생 우리를 위해 헌신한 어머니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죄책감이 여전히 어머니를 향한 짙은 그리움으로, 가족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죄책감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며, 가장 인간적인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자만이 죄책감을 느낀다. 물론 죄책감으로 이미 떠난 이를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은 살아 있는 이들 안에서 사랑으로 숨 쉰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 사랑의 흔적을 붙잡고 싶은, 살아 있는 사람의 갈망일 것이다.
하지만 과도한 죄책감은 자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문제야’ ‘나라는 존재가 걸림돌이었어!’라는 자기비하는 상실의 터널에 갇히게 한다. 터널은 빠져나와야 한다. 죄책감은 잘못을 반성하며 회복으로 나아가는 다리다. 반면 자책감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스스로를 가두는 동굴이다. 죄책감은 행동에 대한 후회지만, 자책감은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올라올 때, 나는 스스로 묻는다.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일까? 아니면 내 존재에 대한 부정일까?”
죽음을 부정하고 후회하며 미안해하는 시간은 곧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초보자다. 넘어지고 일어서며 사랑을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아닐까? 죄책감과 미안함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죽음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고 밀쳐내며, 낯설고 두려운 순간 죄책감에 빠질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사랑’으로 버텨내고 품어낸다면, 그때 우리는 이미 부활을 살고 있는 것이다. 두렵지만 사랑하기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영성이 묻는 안부>
죽음을 밀어내는 부정과 죄책감은, 절망을 견디게 하는 마음의 완충장치입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부정하지 않으면, 마치 내 자신이 무너질 것만 같으니까요.
“그때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왜 조금 더 곁에 있지 못했을까.” 이어지는 죄책감은 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 아닐까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미안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11월 위령 성월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아직 마음 한편에 남은 미안함과 죄책감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지는 그 마음속에서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랑의 감정을 충분히 느껴보세요.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 한편에서 고요한 숨처럼 올라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