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