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회 뉴욕대교구 호손에 있는 로자리 힐 홈에서 한 환자가 도미니코회 캐서린 마리 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OSV
제10장 삶의 끝에서 – 죽음과 고통의 문제
전개 1. 현대 의학의 발전과 연명 의료
“마흔여섯,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에 맞는 죽음은 가혹하였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였다. 그것도 하루하루 생명의 불꽃이 잦아드는 ‘임종 단계’에 있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아산 병원 12층 관찰실(보조 중환자실)에서 ‘악성 림프종’으로 투병 중인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남편은 지난 연말에 휴직하고 병간호를 해 왔다. 그녀는 2주째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전이된 암은 장기 기능 상실로 이어져 황달을 만들었다. 마약성 진통제도 듣지 않는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녀를 둘러싼 것은 온통 기계 장치뿐이었다. 머리 위 모니터에는 맥박과 혈압 등 ‘바이탈 사인’이 반짝거렸다. 기계 호흡 장치(인공호흡기)가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링거 걸이에는 승압제(혈압 유지 약)와 항생제, 영양제 팩이 서너 개 매달려 있었다.”(국민일보, “과연 존엄한 죽음인가?” 말기 암 그녀의 마지막 3개월 중)
어느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기사입니다. 이는 죽음을 둘러싼 문제로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하였고, 특히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늘어나면서 더 자주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인공호흡기와 항암 치료, 혈액 투석과 같은 의료 행위들은 예전에는 금방 죽을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의 삶을 연장해 줍니다. 중환자실(집중 치료실)을 가면 많은 환자가 기계와 호스에 연결되어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살아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의 모습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최대한 늘려야 하는가?”
보통 암 말기 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법률상 말기 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는’(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제2조 3항 참조) 환자를 말합니다. 회복 가능성 없이 그저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기계에 의존해서 생의 말기를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대부분 사람이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얼마든지 중환자실에서 온갖 기계 장치에 의존해 있는 사람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자를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괴롭습니다. 병간호도 어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이른바 ‘죽을 권리’와 ‘안락사’를 요구하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기계 장치에 의존해서 의식도 없이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소위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호상이지.” 장례식에 갔을 때 누군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호상의 의미는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라고 하는데, 어떻게 죽어야 호상이라고 표현하는지 그 구체적인 조건은 오래 살았다는 것 외에는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지막 순간을 떠올릴 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오랜 투병을 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살다가 나이가 차면 가족들 곁에서 잠자듯이 눈을 감는 것을 그립니다. 혹은 죽음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이런 가정조차 전혀 하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누구나 ‘좋은 죽음’을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는 대로 죽지 않는 것은 ‘나쁜 죽음’일까요?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죽음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모습으로 그 사람의 삶까지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톨릭교회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보다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