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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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의 시대, 고통은 통제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신비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36.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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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고통’을 강력한 진통제로 빠르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의학의 발전 덕에 덜 아프게 되었지만, 그만큼 마음의 통증은 깊어지고 있지 않은가. 서울 도심에서 시민들이 바삐 길을 걷고 있다. 뉴시스

“내 손은 약손이고, 네 배는 똥배다. 쓱쓱 낫거라.”

어린 시절, 배가 아프면 엄마는 손바닥으로 내 배를 문지르며 주문처럼 노래했다. 그러면 정말 마법처럼 통증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그 따뜻한 손길 속에서 잠이 들고, 깨어난 아침은 언제나 부활의 새날 같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 작은 서사는 어른이 된 내 마음속에서도 불현듯 떠올라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랑의 묘약이 된다.

요즘은 아이가 “배 아파”라고 하면 엄마는 곧바로 약을 찾거나 병원으로 달려간다. ‘아프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원 가보라’는 말이 돌아온다. 통증은 즉시 사라져야 할 질병이 되었고, 고통의 시간은 가능한 한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은 ‘치유의 과정’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사이 ‘어루만짐의 서사’는 점점 사라지고, 관계 속에서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감성의 여백도 희미해졌다.

현대 사회는 ‘고통’을 강력한 진통제로 빠르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의학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덜 아프게 되었지만, 그만큼 마음의 통증은 깊어지고 있다. 우울과 불안은 현대인의 고질병이 되었고, 관계는 점점 얕아져 간다.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우리는 덜 느끼고, 덜 공감하며, 성숙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있는 듯하다. 아플 틈 없이 치료되고, 불편함을 느낄 여유도 없이 즉각적 만족으로 채워지는 삶 속에서 회복 탄력성은 조금씩 약해진다.

우리는 어쩌면 삶을 ‘살기’보다 ‘유지’하느라 바쁘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생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의 결은 오히려 희미해지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죽음은 준비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사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차분히 떠올려볼 틈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존에만 몰두하다 보면, 고통은 어느새 효율을 떨어뜨리는 불순물로, 삶의 여백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만약 ‘1년 동안 무척 의미 있는 굵은 삶’과 ‘100년 동안 그저 먹고 즐기는 삶’ 중 선택하라면, 우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는 본능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생존 쪽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고통을 배제한 채 길어진 생의 여정에서, 죽음은 낯설고 불편한 현실이 된다. 죽음은 괴물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서 우리는 ‘몸’을 우상시하며 생존 중심의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고통은 결코 악이 아니다. 극심한 통증은 인간의 품위마저 흔들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벌거벗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실과 마주한다. 욥도 그랬다. 하느님 앞에서 흠 없이 경건했던 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욥 3,11) 그는 왜 생명이 주어졌는지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을 만난 후 그는 깨닫는다. 고통은 단순히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신비임을. 그리고 그 신비를 통과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진통제를 습관처럼 찾는다. 두통이 오면 즉시 약을 먹고, 마음의 고통도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게 평생 고통을 피하며 살아온 사람이 죽음이란 거대한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고통을 외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모든 고통을 즉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현대인의 건강 염려증이 점점 일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작은 고통을 외면하며 사는 삶은 결국 죽음도 외면하고, 두려움으로 남기 쉽다.

진통의 시대, 우리는 고통을 없애려 애쓰지만, 고통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신비다. 고통을 통과할 때 우리는 죽음을 배우고, 죽음을 배울 때 비로소 삶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약손처럼, 어루만짐의 사랑으로 고통을 지나 죽음을 마주하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길 바란다. 나의 죽음에도 그 축복이 깃들기를, 위령 성월에 기도해본다.


<영성이 묻는 안부>

100세 시대, 생존의 길이는 길어졌지만 그만큼 삶의 깊이도 깊어졌을까요? 우리는 건강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운동해야 하는지, 아프면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도요. 통증이 오면 검색창에 묻고, 인공지능에 증상을 설명합니다. ‘혹시 큰 병은 아닐까’ 불안해하면서요. 나이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이유도 어쩌면 죽어감의 여정에 들어섰기 때문일 겁니다.

죽어감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섭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고통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하는 신비입니다. 혹시 경험해보셨나요? 두려워서 밀어낼수록, 도망가려 할수록 고통이 오히려 커진다는 것을요. 뇌는 그 불안을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해 고통을 더 오래 붙잡습니다. 특히 마음의 통증은 억지로 없애려 하기보다 그저 자연스럽게 비워지도록 내버려둘 때 비로소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오늘의 작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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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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