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두매아 출신인 헤로데 임금이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빌론 유배 이후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재건한 제2성전을 크게 확장한 매우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입니다. 기원전 19년에 시작한 이 대공사는 예수님 당시에도 진행 중이었고 기원후 64년이 되어서야 마치게 됩니다.
성전은 10~20m 길이의 흰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마치 눈 덮인 산처럼 신비로웠고, 해가 뜨면 성전의 많은 금은 장식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전 입구는 거대한 황금 포도와 청색, 진홍색, 자주색의 고운 아마포로 짠 양탄자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 격언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못했다면 인생에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하나도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당시 세상의 중심이던 로마에 살던 역사가 타치투스조차 예루살렘 성전의 호화로움에는 감탄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소 과장되게(성전 서쪽 벽인 통곡의 벽은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파괴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 파괴의 이유를 언급하지는 않으시지만,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하느님의 집으로서 본모습을 잃고 도둑이나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이 존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실제로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70년에 멸망합니다. 이것은 66년에 유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결과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언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68년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갑자기 물러나자 재빨리 데카폴리스의 펠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로마군의 후퇴는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유다인들이 자신들이 승리한 양 기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로마의 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보낸 아들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6만 명의 강력한 세 군단이 70년에 유다를 재침공합니다.
예루살렘은 5개월간 포위된 후 철저히 파괴되고 불태워졌으며, 주민들은 처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포위 기간에 굶어 죽은 사람 수만 해도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유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때 모든 식량을 도시 방어군에게 빼앗긴 한 여인이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아기를 잡아먹은 끔찍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약 1천 명에 달하는 유다군이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군의 포위 공격과 공성전에 패하여 몇 명을 빼고 모두 자결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땅의 이름마저 팔레스티나에 내어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곧 닥쳐올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종말 사건의 상징으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표징들은 이러합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악의 세력이 창궐하여 전 우주적인 재앙이 발생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가 전쟁하게 될 것이며, 대지진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발생할 것입니다. 심지어 시간의 기준으로 삼을 정도로 항구하다고 믿는 천체 운행에도 이상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묵시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요한 묵시록과 구분하여 ‘소(小) 묵시록’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디 묵시 문학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상징적인 표현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껏 많은 이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등의 재앙이 있을 때마다 날짜까지 지정하며 임박한 종말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듯이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우리 인생처럼 이 세상에도 시작이 있었으니,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끝도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것이 순리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이 두려운 멸망의 때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때라고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끝이 끝이 아닌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공포심을 이용하여 영육과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짓 종말론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 또한 우리가 종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참조)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