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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음 앞당기는 안락사

청년들을 위한 생명 지킴 안내서(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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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병동에 환자가 누워있다. OSV


제10장 삶의 끝에서 – 죽음과 고통의 문제

전개 2.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


“호주에 사는 데이비드 구달은 올해로 104세다. 그는 지난 2일 스위스 바젤로 여행을 떠났다.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미국 매체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구달은 현재 특별한 지병이 없다. 90세까지 테니스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다. 70년 이상 생태학 연구에 매진한 학계 권위자로서 에디스 코완 대학교 명예 교수로 재직해 왔다. 102세이던 2016년에 대학이 퇴임을 요구하면서 그는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일이었던 지난달 4일 그는 호주 매체와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까지 살게 된 것을 매우 후회한다. 죽는다는 게 특별히 슬픈 일은 아니다.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노인들이 조력 자살권을 포함한 완전한 형태의 시민권을 누려야 한다.’”(허핑턴 포스트, 104세 호주 과학자가 스위스 여행을 떠난 이유는 특별하다 중)

이는 2018년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숨을 거둔 데이비드 구달이라는 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노교수는 노인들이 ‘조력 자살권’을 포함한 완전한 시민권을 누려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곧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살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수명이 길어지고 생의 말기를 고통스럽게 보내야 하는 상황들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조력 자살을 요청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력 자살을 할 수 없지만, 외국의 몇몇 나라는 조력 자살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케보키언이라는 의사는 자신이 개발한 기계를 통해서 130여 명의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조력 자살은 ‘안락사’의 한 형태인데,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은 의사가 환자에게 적당한 약물을 처방해 주는 형태입니다.

보통 ‘안락사’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환자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앞당기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안락사는 환자에게 치사량의 독약을 주사해서 죽게 하는 경우가 될 수 있고, 환자에게 영양·수분 공급을 중단해서 굶어 죽게 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나 한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래서 안락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또는 의도적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로 이해된다.”(「안락사에 관한 선언」 2장)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5


덧붙이는 묵상

‘안락사’의 사전적 의미는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환자에 대하여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입니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 보다 안락하게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락사는 영어로도 ‘mercy killing’ 즉 ‘자비로운 죽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 의미처럼 안락하고 자비롭기만 할까요? 초기에는 죽음이 예견되는 성인 말기 환자들 위주로만 가능했던 안락사의 조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건강한 노인, 불치병을 앓는 청소년 등까지 범위가 점점 확대되는 겁니다. 이쯤 되면 안락사가 진정으로 안락한 죽음을 의미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처럼 엄격한 조건으로 시행하면 괜찮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그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노인 자살률이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입니다. 자살 예방 정책을 통해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오랜 기간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택하는 사례들을 보면서 안락사라고 부르지만 결국 자살을 방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가르는 한 끗 차이는 무엇일까요?

삶과 죽음은 단순히 고통을 안고, 떠나 보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죽을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는 터널 끝에 있는 한줄기 빛마저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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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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