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현존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고,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나며, 믿는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가까운 이에게까지 미움과 위협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종말에 관한 표현을 ‘묵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 문학은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박해 시기에 성행하던 표현 양식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데도 축복보다는 고통을 받고, 권력자들은 악과 타협하며 세상의 승리자처럼 보이는 불의한 현실에서 시작된 표현입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악의 상황을 인내하고 이겨내면 새 세상을 맞이하리라는 현재에 대한 성찰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세상 것은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끝이 절망은 아닙니다. 믿음은 끝으로 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희망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새 세상의 희망의 날까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연중 제33주일은 선종하신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신 날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시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자주 말씀하시며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이들은 가장 작은 이들이고 취약한 이들로서 사회 공동체 밖으로 버려진 이들입니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회 공동체원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들 편에서 그들이 다시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셨습니다. 노숙자·중독자·난민·토착민, 점점 소외당하는 노인들, 이민자들이 이 시대 가난한 이들이며, 인신매매의 희생자들, 불법 공장이나 매춘 조직에서 일하는 이, 구걸에 이용되는 어린이들, 불법 노동착취를 당하는 이들, 배척과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에 시달리는 여성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는 무죄한 태아도 가난한 이들이며, 나아가 경제적 이윤과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피조물과 자연도 가난한 존재에 포함하였습니다.(「복음의 기쁨」 210~215항 참조)
그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사회 공동체에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가 공멸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무너져가는 생태계와 오염되고 있는 자연환경까지 가난한 이들 안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적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내려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닮고, 스스로 늘 가난과 벗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신앙 성숙의 결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도구입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