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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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비극, 삶과 형식 대립하는 자기모순에서 비롯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4. 문화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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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회의 발전은 인간 이성과 창조력을 토대로 이룬 성취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든 체계나 산물에 의해 지배받는 자기모순을 낳음으로써 인간의 자기 소외를 발생시킨다.

근대성의 자기모순과 그로 인한 인간의 자기 소외 현상을 가장 깊이 통찰한 사상가로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베버(Max Weber, 1864~1920)·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자기의 창조물로부터 소외되고 주체성을 상실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지만, 분석의 초점과 진단의 논리는 서로 다르다.

마르크스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소외’를, 베버는 합리화된 제도의 체계가 인간의 자율을 억압하는 ‘사회적 소외’를, 짐멜은 근대 도시와 화폐경제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소외’를 주장한다.

짐멜은 특히 문화의 팽창 속에서 인간 주체의 소멸 현상을 ‘문화의 비극(Tragödie der Kultur)’이라고 규정한다. 그에게 문화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정신이 객관적 산물을 만들어내고, 그 산물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는 문화 자체가 주관적 영혼의 에너지가 창조적 삶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독립적인 객관적 형태를 획득하고, 이 객체가 다시 인간의 주체적 삶의 과정으로 용해되는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문화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작용하면서 상호 가치를 증대하는 과정으로서 우선 인간 정신의 결과물인 예술·과학·기술·제도와 같은 ‘객관 문화(objektive Kultur)’를 창조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기를 내적으로 성장시키는 ‘주관 문화(subjective Kultur)’를 만들어낸다. 이 두 영역이 조화롭게 순환할 때 문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짐멜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이 효율성을 위해 만든 제도나 체계인 객관 문화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고 통제함으로써 두 문화 사이의 순환이 깨지고 문화의 비극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화의 비극은 본질적으로 객관 문화가 주관 문화를 압도하며, 인간이 자신이 만든 산물에 지배당함으로써 두 문화 사이의 불균형이 생겨 더는 객관 문화가 개인의 삶에 기여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런 비극은 문화의 발전 과정 안에서 생성의 원리인 ‘삶(Leben)’과 삶이 만들어낸 고정적 원리인 ‘형식(Form)’이 서로 대립하는 자기모순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문화의 비극 속에서 삶이 만들어내는 형식에 갇혀 의미 상실을 겪으며 내적으로 붕괴된다.

그러나 문화의 비극은 우리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의 자각을 통해 문화적 주체로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인간은 객관 문화의 압도 속에서도 내면의 자유를 충분히 발휘하고 자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 감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짐멜의 문화의 비극이 부정적인 측면보다 인간이 자기 성찰을 통해 근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넘어서서 문화 주체로서 자기의 문화 세계를 주도해 갈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만큼 오늘날 첨예한 문화적 갈등을 겪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문화의 비극적 역설을 올바로 자각하고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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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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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사탕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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