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음을 닮고,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하루가 온전한 인생이라면, 우리는 매일의 하루 속에서 이미 죽음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을 알리고 있다. OSV
“네가 태어날 때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죽을 때는 세상은 울어도 네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라.”
아메리카 원주민 나바호족의 이 말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명언과 닿아있다. 삶의 끝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를 묻는 말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는 울지만, 세상은 웃는다. 편안한 자궁이라는 우주에서 밀려나 낯선 공기 속으로 나온 아기는 생존의 끈이던 탯줄이 끊기며 처음으로 ‘이별의 두려움’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울음을 생명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별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탄생을 맞는 것, 그것이 인간이 오래 품어온 진실이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 과연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고도 내 일상은 곧 제자리를 찾는다. 너무 잘 지내는 내 모습이 문득 죄스럽다. 결국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다. 이 평범한 진실 앞에서 마음이 쓸쓸해진다. 미소 지으며 세상을 떠날 자신이 없다.
소설가 김훈은 “하루는 한 인간의 일생과 맞먹는 시간”이라 했다. 정말 그렇다. 하루 속에는 탄생과 성장, 쇠락과 죽음이 모두 들어 있다. 아침은 탄생이고, 저녁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웃으며 죽을 수 있을지의 답은,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돌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날 때 웃지 않듯, 아침에도 웃으며 눈뜨지 않는다. 마치 죽음에서 잠시 깨어나는 듯한 몽롱한 상태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런 멍한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붙잡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다, 서둘러 하루를 시작한다. 가족과의 대화는 피상적이고, 해야 할 일은 미뤄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가 있다. 하루를 무난히 보낸 듯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들떠 있다. 밤이 되어도 각성된 뇌는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마치 죽음을 미루듯 우리는 늦은 밤까지 화면을 넘긴다. 도파민 자극에 길들여진 뇌는 만족도도 쉼도 모른 채 깨어 있고, 몸은 누워 있어도 영혼은 쉬지 못한다. 삶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것 같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허무하고, 그 허무는 또 다음 날로 이어진다. 죽으면서 웃을 수 없는 하루 치 인생이다.
그러나 하루를 정성껏, 성실히, 사랑으로 채워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된 일 속에서도 동료와 나눈 진심 어린 대화 한마디, 가족에게 건넨 ‘고마워’라는 인사, 낯선 이에게 내민 작은 배려. 그런 순간들이 하루를 의미로 채운다. 그럴 때 뇌에서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물질이 분비되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따뜻해지며 뇌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몸은 지쳐도 마음은 평화롭다. “오늘 하루 참 잘 살아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잠드는 밤은 고요한 감사로 가득하다. 그때의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뇌가 스스로를 정화하고 재생하는 시간이다. 깊은 잠 속에서 하루의 피로와 감정이 씻겨 나가고, 기억은 새로 배열된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새 선물을 받은 듯 평화롭다. 웃으며 죽을 수 있는 하루 치의 삶이다.
결국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그날 밤 어떻게 잠드는지가 결정된다. 의미 있는 노력은 깊은 쉼을 부르고, 무의미한 자극은 피로한 각성을 남긴다. 그 차이가 마지막 그날, 편안히 떠날 수 있을지의 경계를 가른다.
삶은 죽음을 닮고,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하루가 온전한 인생이라면, 우리는 매일의 하루 속에서 이미 죽음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삶을 더 깊이 기억하는 일이다. 죽음을 기억하면 오늘이 더 선명해지고, 살아 있음의 의미가 더욱 뜨거워진다. 잘 죽고 싶어지면, 자연히 잘 살고 싶어진다.
세상은 울어도 나는 웃는 죽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끊어진 탯줄이 생명의 시작이었듯, 이별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곳에서 주님과 천사들이 나를 반기며 맞이해주실 것이다. 태어날 때 울었으니, 이제 떠날 때는 웃을 일만 남았다.
<영성이 묻는 안부>
저녁은 죽음이고, 아침은 부활입니다. 하루가 한 인생이라면, 저녁에 잘 잠드는 일은 곧 아침에 잘 일어나는 일, 잘 죽는 일은 잘 사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뇌과학자들은 현대인이 디지털 홍수 속에서 늘 ‘각성 상태’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몸은 지쳤는데 뇌는 깨어 있어, 잠들지 못하거나 얕은 잠만 반복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개운하지 않고, 그 피로를 달래기 위해 또다시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악순환입니다.
매일 밤 불안과 각성 속에서 뒤척이는 사람은 결국 삶 전체가 불안해집니다. 마지막 그날 또한 평화롭게 맞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를 정성껏 산 사람은 밤에 깊이 잠듭니다. 그 잠은 단순한 수면이 아니라 ‘작은 죽음’입니다. 온전히 내려놓고, 온전히 쉬며, 뇌와 몸이 스스로를 재생하는 시간.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그것은 ‘작은 부활’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삶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잘 죽기 위해 오늘도 잘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밤, 웃으면서 잘 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