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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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마음을 열어 현실과 미래 이어주는 능동적 행위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39.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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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나 거리에서 혼잣말로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사람들은 힐끗 바라보지만, 그들은 과거의 깊은 상처에 갇혀 주변 현실을 감당할 힘이 없다.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그 안에는 성폭력이나 구타 등 고통스러운 기억의 잔향이 묻어 나온다. 그들의 시간은 과거 속에 머물러 멈춘 듯하고, 지금의 현실은 어쩐지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몰입한 채 가상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현대인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때가 있다. 물론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과거나 가상에 머무르다 보니, 지금, 여기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실제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어느새 ‘버텨야 하는 시간’이 되었고, 디지털 기기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현재는 빠르게 흡입되어 사라진다.

즉각적 만족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현실의 시간, 숨 고르는 시간, 기다림을 견디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심리적 피로와 일상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가상공간에 머무르다 보면, 결국 가장 소중한 것, 지금 여기의 시간을 놓치게 된다. 디지털 공간은 분명 한순간의 심리적 안전지대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 머무르지 않으면 기다림도 함께 사라진다. 기다림은 미래가 아니라, 분명 ‘현재’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단어 중 하나가 ‘기다림’일지 모른다. 즉각적 만족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모든 것이 초 단위로 효율화된 사회에서 기다림의 여유와 설렘은 점점 줄어든다. 약속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곧바로 전화를 걸어 재촉하고, 다음 전철이 바로 뒤에 와도 초조해하며 만원 전철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 조급함은 단순히 편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다방은 단순한 커피숍이 아니라 기다림의 장소였다. 연락이 쉽지 않았던 만큼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성냥개비를 쌓거나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그 시간은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었고, 만남의 대상을 향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을 뜻하는 라틴어 ‘exspectare’는 ‘밖을(ex-) 바라보다(spectare)’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의 ‘expectation’도 같은 어원을 지닌다. 기다림은 막연한 수동이 아니라, 대상을 향해 마음과 몸을 기울이는 능동적 태도다. 우리말 ‘기다리다’ 역시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시간을 들여 바라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합격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채우며 현실의 시간을 살아간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기다림의 깊이를 결정한다.

기다림은 미래를 향해 준비하는 완전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때가 되면 오겠지’하는 방치의 태도가 아니다. 한 송이 국화를 기다리는 시인이 국화 옆에서 떠나지 않고, 먹구름과 소쩍새 울음 속에서 머무는 이유는 기다림이 멈춰있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란 꽃잎을 보기 위해 잠을 설칠 만큼 마음을 열고 깨어있는 시간, 그것이 기다림의 본질이다.

기다림은 존재를 깨우고, 마음을 열어 현실과 미래를 이어주는 능동적 행위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있는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노란 국화 한 송이가 필요한지 모른다. 잠을 설칠 만큼 기다려본 것이 언제였는지,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빼고 잠시 주변을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는 창밖을, 누군가는 허공을 볼 것이다. 그 짧은 순간, 기다림이 시작된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어떤 대상을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있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며 버티는 순간도 있지요. 우리는 흔히 기다림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조금 막연하거나 수동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다림에는 작은 영성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즉각 반응하는 디지털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이 ‘기다림’이라는 영적 태도는 더 소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올 것을 바라기 전에”, 이미 주어진 지금의 시간을 깊이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일을 붙잡으려 애쓰는 대신,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 깨어서 바라보는 일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영원을 “모든 시간의 완전한 소유”라고 말했습니다. 영원은 끝없이 펼쳐진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품고 계시며 감싸안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영원은 ‘저 먼 어딘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인 ‘지금, 여기’와 이어져 있지요. 기다림도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희망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 구원의 완성은 ‘언젠가’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내일을 붙잡으려 애쓰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현재를 깊이, 깨어 살아보자는 초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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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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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사탕2025. 11. 26

로마 13장 9절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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