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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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상황, 회피 아니라 직면할 인내와 용기 필요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6.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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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고 알베르 카뮈(1913~1960)는 말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마찬가지로 죽고자 하는 의지 역시 인간 실존의 엄연한 현상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단하는 자살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자살은 자연적 죽음과는 다르게 다양한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하는 부정적인 자기 결정의 행위다. 자살에 관한 수많은 사회학적·병리학적 담론은 자살의 원인 규명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과 불안증에 의한 심신질환이나 정신장애로 보든, 가난·고립·부조리 등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다양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든,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자살 연구는 그 원인을 찾아 ‘예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자살에 관한 근본적 통찰은 결여되어 있다.

즉 이들에게 자살은 오로지 치료받거나 예방해야 할 질병으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행위로 너무 단순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자살’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자살이 엄연한 사실이라면,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철학적 해명이 필요한 인간 삶의 근본 물음이다. 생존 욕구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면, 이에 반하는 자살은 분명 본능을 역행하는 반생명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자살이 일반적으로 순간의 어떤 충동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하지만, 그 실행의 근거는 인간의 의지 행위에 있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자살자는 결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살은 생명의 차원에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살은 어느 때는 전혀 예측 불가하고 이해 불가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하기에 자살자에 대해 반사회적 행위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을 자제하고, 보다 유연하고 개방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야스퍼스(1883~1969)는 「일반정신병리학」에서 심리적·인과적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자살’을 언급하며, 이는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불가해한 자살’은 그 어떤 심리학적 원인이나 동기로도 설명될 수 없으며,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판단조차 무력화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의 한계’가 오히려 인간 실존에 초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불가해한 자살이라는 한계상황은 바로 나에게는 실존적 응답을 요구하는 무제약적인 사건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충동적 존재도, 현존의 방식을 따르는 합목적적 존재도 아니며, 오로지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자기 실존을 스스로 떠맡는 가능 존재로서 초월의 무제약적 행위를 하는 정신적 존재다. 무제약적 행위는 인간 실존의 내적 자유에 근거한 절대적 행위이자 자기 실존을 위한 양심적 결단의 행위다. 물론 그렇다고 불가해한 자살이 곧바로 나의 실존적 결단에서 오는 무제약적인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자살인 한, 불가해한 자살 역시 ‘한계상황의 회피’라는 오명을 피해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자기에게 닥친 한계상황을 회피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직면하고 감당하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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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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