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복음에는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마태 3,1-12 참조) 이는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루카복음 6장 44절과 맞닿아 있는 말씀이며, 열매가 없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마태 21,18-22 참조)도 떠오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 무화과나무는 철도 아니었는데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하고 죽게 하셨으므로(마르 11,12-14과 그 병행구 참조)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신 것일까요?
무화과는 우리나라에도 잘 자라지만 가나안의 일곱 토산물(신명 8,8 참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옛 유다 전승에서는 무화과를 선악과로 보았습니다. 원조들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책감을 느낀 뒤 선악과의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6-7 참조)고 풀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도 자랐고 가나안의 토산물에 속하는 무화과는 예부터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한 나무입니다. 호세아서 9장 10절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만나셨을 때 무화과의 맏물을 발견하신 듯 기쁘게 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무화과와 관련된 지명도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다는 마태오복음 21장 1절의 ‘벳파게’는 ‘덜 익은 무화과의 동네’를 뜻합니다. 벳파게 바로 근처에 자리한 베타니아(마태 21,17-19 참조)는 ‘무화과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을 주는 구절은 예레미아서 8장 13절입니다. “내가 거두어들이려 할 때 ···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이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인데도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기에 당신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건 나무가 상징한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기 위한 일종의 상징 행위였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뽑아와 가나안에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는데(시편 80,9 참조) 양질의 열매가 아닌 딱딱하고 시큼한 들포도만 맺으므로 이를 꾸짖은 것(이사 5,2.7; 예레 2,21 등 참조)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도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복음 11장 13절 등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당시 열매를 내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의 첫 열매가 5~6월에 나오지만, 보통 수확하는 건 당도 높은 8월 중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는 성경에서 ‘여름 과일’로 자주 통합니다.(아모 8,1; 미카 7,1 등 참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과월절 직전이므로(마르 11,12-14과 병행구 참조) 말 그대로 무화과 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 11장 13절의 ‘철’은 그리스어로 ‘크로노스’, 곧 시계처럼 객관적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 곧 주관적이고 질적으로 의미화된 시간으로서 ‘때’를 의미합니다.(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등 참조) 이에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상징임을 감안하면, 이 ‘때’는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시기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지만 자기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은 건강해 보였지만 실속이 없어 빛 좋은 개살구와 같았다는 꾸짖음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처럼 그들이 변질시킨 성전이 특히 그러하였는데(마르 11,17 참조), 언뜻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도 하고 비싼 제물도 바치는 등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완고함과 그들이 타락시킨 공허한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리라는 예고를, 백성의 상징인 무화과나무를 매개 삼아 전달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 11장과 그 병행구에는 무화과나무와 성전 정화 사건이 나란히 나옵니다.
성전은 이후 예수님의 예고처럼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이제는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된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2코린 6,16 참조)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무화과나무 일화와 더불어 소리만 요란한 수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닥치므로(1테살 5,2 참조)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