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로 팔려온 소녀들을 해방하는 데 헌신했던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성녀는 이탈리아 사보나교구에 속한 리구리아 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도자기 공예가 아버지 아래서 아홉 자녀 중 넷째였던 마리아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도왔습니다. 점토 작업과 집안일,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에 힘썼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그는 일찍이 수도생활을 원했지만, 건강 등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6살 때 프란치스코회의 제3회원으로 입회했습니다. 마리아는 19살부터 7년 동안 자녀가 없는 사보나의 부유한 몬레오네 가문에서 병상에 누운 주인을 돌보는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마리아의 모범적인 태도에 감동한 몬레오네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뒤 그를 하인이 아닌 양녀로 삼아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함께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수도 성소에 대한 소명을 느껴 이를 거절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선사업에 헌신하는 한 수도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최소한의 지참금을 구할 수 없어 거절당하고 맙니다. 그 무렵 어머니와 둘째 오빠, 여동생과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빠집니다. 더불어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1837년 사보나교구의 아고스티노 데 마리 주교는 그 도시의 많은 소녀와 젊은 여성이 겪는 위험에 대해 걱정하며, 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계획했습니다. 자원봉사자를 찾을 때 주교의 뜻에 공감했던 마리아는 기꺼이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마리 주교는 마리아에게 집을 한 채 주며 소녀와 젊은 여성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곧 함께할 세 동료가 모이면서 1837년 8월 10일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자비의 성모의 딸들’이라 불렀습니다. 그해 10월 22일 수도회로 공식 출발하며 수도복을 입은 마리아는 주교로부터 마리아 요세파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장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소규모로 출발한 수도회는 설립 목적에 따라, 점차 소녀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운영하면서 ‘자비의 성모의 딸 수도회’(Daughters of Our Lady of Mercy)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1839년 종신서원을 한 마리아는 이듬해 총회에서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이후 마리아는 선종까지 40년 동안 원장으로서 수녀회를 이끄는 데 헌신했습니다. 오랜 후원자인 몬레오네 부인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수도회의 재정적 어려움도 극복했습니다.
마리아는 1856년 리구리아에서 아프리카 노예 해방을 위해 헌신해온 두 사제와 노예로 팔려온 소녀들을 보호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59년 사보나에 빈민 계층 소녀들을 위한 ‘섭리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마리아는 사보나의 수호성인이자 리구리아 도예가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