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령층의 유튜브 과몰입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커질수록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손 안의 화면은 즉각적인 자극과 재미로 외로움을 잠시 덮어버린다. 꿈을 꾸듯 디지털 가상 속에서 신기해하고 웃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화면을 끄는 순간, 오히려 더 적막하고 공허한 잔상이 남는다. 특히 사회적 관계망이 약해진 고령층에게는 이러한 허무감이 오히려 고립을 더 깊게 만든다.
장자의 고사 ‘호접지몽(胡蝶之夢)’이 떠오른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어난 뒤 혼란에 빠진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나?” 이렇듯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 그것이 바로 호접지몽이다.
장자처럼 우리도 매일 나비가 된 듯 가상의 공간을 날아다니며 산다. 가상이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경험’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잠들지 않은 채 꿈을 꾼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울고,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마음을 졸인다. 릴스 속 타인의 삶에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가상 속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으니까. 재미는 강력하다. 클릭 한 번이면 웃음이 터지고, 스와이프 하나면 놀라움이 밀려온다. 아무 준비도, 아무 기다림도, 아무 관계의 수고도 필요 없다. 그저 보기만 하면 된다.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감정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 종일 재밌는 것들을 보고 듣고 소비했는데, 밤이 되면 마음이 허전하다. 많이 웃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고, 자극은 넘쳤지만, 마음은 텅 빈 것 같다. 왜 그럴까?
재미는 순간적인 반응이다. 외부 자극으로 찾아오는 흥분과 즐거움이다. 찾아올 때는 반갑지만 지나가면 흔적이 없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손님과 같다. 그래서 고립을 치유하는 감정은 ‘접속의 재미’가 아니라 ‘접촉의 기쁨’일 것이다. 누군가와 진짜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함께 웃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때 비로소 느껴지는 감정이다.
기쁨은 외부에서 던져지는 자극이 아니라, 내 안에서 천천히 스며 오르는 감정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 문득 “아, 이 사람과 함께 있어서 좋다”라는 감정이 밀려오는 순간. 아이의 웃음 속에서 “오늘 친구 도와줬어”라는 한마디를 들을 때의 뭉클함. 새벽녘의 고요 속에서 문득 깨달음이 찾아와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 주일 미사에서 성가의 가사가 마음을 건드려 목이 뜨거워지는 순간. 이런 순간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SNS에 올릴 만큼 극적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잔향으로 가슴에 머문다.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흔드는 영적 체험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다는 의미를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재미는 원할 때 불러낼 수 있지만, 기쁨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선물이다. 그래서 기쁨은 서두르거나 움켜쥔다고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관계를 돌보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찾아온다.
장자는 꿈에서 깨어나 “지금의 내가 진짜인가, 꿈속의 나비가 진짜인가”라고 질문한다. 우리도 가상의 재미 속 한가운데서 잠시 멈춰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 기쁨인가”를 되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재미는 삶을 밝히는 소중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자극적인 재미가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그 기쁨은 지금 이 순간,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잠시 멈추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이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본 순간이 있었는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한 순간이 있었는가?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평온해지는 순간이 있었는가? 내가 진심으로 갈망하는 것은 자극의 재미인가, 고요한 기쁨인가? 주님이 가까이 오시는 대림 시기, 우리가 ‘접속의 재미’ 대신 ‘접촉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주님 오심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기뻐하라! 주님께서 가까이 오신다.
<영성이 묻는 안부>
허기질 때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금방 배는 부르지만, 몸이 진정 원하는 영양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롭고 허전하고 삶의 의미가 흐릿해질 때, 우리는 본능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스크롤을 내립니다. 영상과 자극으로 마음을 채워보지만, 잠깐의 포만감 뒤에는 더 깊은 공허만 남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내적 힘입니다. 그것은 삶을 치유하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회복시켜 주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 공동체는 이 기쁨을 함께 체험하고 나누는 자리입니다. 함께할 때 기쁨은 더 또렷하고 깊어지며, 다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줍니다. 이번 한 주 영혼의 허기를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재미로 달래려 하기보다, 고요히 주님 안에 머물며 기뻐하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