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 가장 어린 사람은 열일곱 살 내 아이다. 17년 전에도 지금도 내 아이는 우리 집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주다. 내 아이가 커 갈수록 어린이, 출산 및 육아 정책 등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집안의 어르신들(할머니·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노인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갔다. 엄마와 아빠는 그간 줄곧 아직은 젊은 노인이었기에, 허리가 굽고 귀가 안 들리는 노인들에 대해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내 일이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손원평 작가가 쓴 소설 「젊음의 나라」 속 주인공 이름은 나라다. 나라는 젊다. 젊은 나라는 미래에서 나이 든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돈이 아주 많은 노인들, 조금 많은 노인들, 보통 수준의 노인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극빈한 노인까지, 나라는 그 그룹들을 차례로 경험한다. 나라의 궁극의 목표는 완벽한 섬에 가서 젊은이로 사는 것이다. 세상의 유토피아로 여겨지는 시카모아 섬에 들어가 젊은 인력이 되는 것. 그것은 나라의 오랜 꿈이자 인생의 목표다. 섬 안에는 젊은이가 필요하고 젊은이에게는 노인을 돌보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게 유토피아라는 것은 소설 제목만큼이나 중의적이고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 방문했던 응급실에서 나는 젊음의 나라를 경험했다. 중년의 보호자와 노년의 환자를 맞이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년들이었다. 구급차를 운전하는 이부터 응급처치를 하는 이까지 모두 젊었다. 응급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청원 경찰과 젊은 의사, 그리고 더 젊은 간호사들. 미래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젊은 누군가는 나이 든 누군가를 돌보는 중이다. 나이 든 누군가가 어린 누군가를 돌보고 키웠던 것과 꼭 같다. 우리는 이미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세상이다.
내 주변에 아이가 살고 노인이 사는 것을 실감하는 공간과 순간이 있다. 바로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다. 우리는 미사 중 짧은 시간, 단 5초에서 10초가량 정성껏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더 많은 사람과 눈을 맞추고 더 많은 사람에게 호의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순간이 서로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온기는 엄청나다. 내 집에 더 이상 아이가 없고 나는 아직 노인과 함께 살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실재를 느낀다. 바로 옆에 있는 연약한 아이와 연약한 노인들. 미사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내내 내 앞의 어린이를 유심히 보게 된다. 작고 귀엽고 서툰 기도가 이어진다. 그리고 내 옆의 노인도 오랫동안 바라본다. 느리고 경건하며 원숙한 기도가 이어진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는 귀여움을 받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청년은 환대를 받는다. 중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지식과 지혜를 신뢰받고,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려받고 존중받는다. 교회란 그런 공간이다. 선의와 호의로 가득한 공간, 적의와 무관심은 내려놓는 공간. 교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새롭게 깨닫고 연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잊지 않고 세상에 나가 실전에 임할 일이다. 그러라고, 그럴 기회를 주님께서 교회라는 공간을 이용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