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중
친구가 무심히 툭, 명언을 내뱉는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내 인생 최고의 덕질 상대는
예수님이지.”
최근 즐겨 본 드라마가 있다. KBS 주말드라마 ‘화려한 날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사는, 3대가 다복하게 한집에 사는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다.
‘화려한 날들’ 속 최고 연장자는 할머니다. 극 중 나이 88세. 할머니는 88세의 나이에 시니어 모델 스쿨에 등록한다. 손녀의 유튜브에 나가서 이른바 K-할머니 패션을 선보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시니어 모델 제안을 받은 것이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을 하고 모델처럼 워킹을 하는 할머니. 88세에 화려한 날을 맞이한 할머니의 모습은 본인과 보는 이들 모두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첫 쇼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후 할머니는 본인이 번 돈으로 가족이자 평생의 친구가 되어 준 며느리에게 비싼 옷을 턱턱 기분 좋게 사준다. 그리고 모처럼 지하철이 아닌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나는 이제부터 할머니의 화려한 전성기가 그려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지금부터는 조금 진부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법한 88세 노인의 화려한 전성기를 마음 놓고 보아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쇼타임이 너무도 짧았다. 나는 지금 막 시작한 영화가 불시에 끝이 난 기분이 들어 허망했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판타지인 걸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는데. 화려한 날 하루가 아니라 드라마 제목처럼 화려한 날들로 그려줬으면 어땠을까. 끝난 이야기에 두고두고 미련이 남았다.
드라마 ‘화려한 날들’ 속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책이 생각났다. 출판사 백화만발에서 나온 시니어 그림책 「결코 늦지 않았다」이다. 백화만발의 ‘시니어 그림책’ 시리즈는 5090세대를 독자로 하는, 5090세대의 삶을 이야기로 담은 책이다. 「결코 늦지 않았다」 속 주인공은 은퇴 후 삶의 의미를 잃는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뭘 해도 재미가 없다. 그러다 결국 병이 나는데, 젊은 의사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좀 쉬시면서 마음을 옴팍 쏟을 곳을 찾아보세요.”
의사가 젊어서 아직 뭘 잘 모르나, 이 나이에 마음을 옴팍 쏟을 곳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렇게 한탄하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보디빌더 대회 포스터를 보게 된다. 근육을 뽐내는 다양한 연령대의 보디빌더들. 할아버지는 홀린 듯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한국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꿈꾼다. 가족들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손주들만은 할아버지의 꿈을 응원했고 할아버지는 롱펠로의 시 ‘결코 늦지 않았다’를 되새기며 난생처음 보디빌딩에 발을 들인다. 괴테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 「파우스트」를 완성했다는데,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발견한다. 보디빌딩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일이었다. 엄청난 열정으로 차근차근 서서히 변화의 변화를 거듭하던 할아버지는 마침내 보디빌더가 된다.
어떤 분야나 사람에 몰두하여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덕후’라 하고 그러한 행동을 ‘덕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림책 속 할아버지는 보디빌딩이라는 덕질을 하는 중이다. 그 덕질이 할아버지의 인생을 신명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안에 내재되어 있던 덕질 본능이 발현된 것은 은퇴 후 나이 60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발현된 덕후 기질이 나는 무척 반갑고 기뻤다.
이른바 ‘덕질 유전자’는 사는 동안 내내 이어진다. 여기에서 저기로 대상을 옮겨갈 뿐 유전자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 오랜 친구는 덕질의 천재다. 어릴 때는 배구 선수를 좋아해 코트를 열심히 쫓아다녔고, 커서는 이승환을 좋아해 음악에 심취했고, 지금은 BTS를 지키는 아미가 되었다. 친구에게는 인생의 마디마다 열성적으로 좋아할 누군가가 또는 무언가가 있었다. 친구의 인생은 덕질이 있어 항상 행복했다. 그리고 다가올 노년 또한 덕질 본능으로 즐겁게 지낼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뭔가 하나에 열정을 갖는 능력은 재능이다. 그로 인해 인생이 자주 신이 난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중 친구가 무심히 툭, 명언을 내뱉는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내 인생 최고의 덕질 상대는 예수님이지.” 그렇지. 친구의 인생을 생각할 때 정말 맞는 말이다. 이 덕질은 상대를 옮기지도 않고 꾸준히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친구가 “내 인생에 남자는 예수님뿐”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 말했던 것 또한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친구의 인생을 알기에 나는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든다. 열성적으로 신앙을 즐기는 유전자라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귀한 질투를 해봤다. 그것은 정말, 최고의 유전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