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늦가을 초겨울 무렵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는 열 명 안팎의 청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세례로 설립된 신앙 공동체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사진은 서울 청계천변 옛 수표교 자리 인근에 설치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 가톨릭평화신문 DB
한국 교회 전례력으로 2026년 1월 11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참하느님이신 분께서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마태 3,15) 위해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세례를 받으셨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주님께 머무셨으며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응답하셨다.(마태 3,16 참조)
이승훈의 세례,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다
이처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었다. 이 놀라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이 조선 땅에도 충만하게 내렸다. 그 새로운 창조의 서막은 이렇게 열린다. 연행사 일행으로 청나라 수도 북경에 간 이승훈이 1784년 초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다. 그라몽 신부는 “하느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다”고 설명했다.(1790년 6월 23일자 그라몽 신부 서한 참조)
이승훈은 1784년 음력 3월 말, 곧 양력 4월에 귀국했다. 그의 짐보따리에는 북경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선물한 가톨릭 서적과 십자가상·성화·묵주 등이 가득 있었다. 이승훈은 이것들을 이벽에게 보여주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가톨릭 서적을 들고 한양 저동의 외딴집을 세내어 탐독했다. 그는 책들을 읽어 갈수록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움텄고,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더불어 구세주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열정이 커갔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확신이 선 이벽은 이승훈과 정약전·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것이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입니다.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07~308쪽) 그리고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을 차례로 찾아가 세상의 기원과 창조 질서, 하느님 섭리, 영혼의 본성 등을 주제로 토론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믿을 것을 권고했다.
이벽의 집에서 거행된 첫 세례식
이승훈은 귀국 후 벌어진 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윤유일을 통해 1789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냈다. “제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저에게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되었던 일은 제가 갖고 온 책들을 가지고 제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저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어떤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 그 사람은 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저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나 열렬하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던지, 저는 모든 사람의 요청대로 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을 때 행해졌던 예절을 따라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이 베드로가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중- 윤민구 신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42~43쪽)
이승훈이 말하는 ‘어떤 학자’는 이벽을 가리킨다. 이벽을 중심으로 가톨릭 서적을 함께 공부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한 이들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청했다. 첫 세례는 1784년 음력 9월 곧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거행됐다. 이승훈은 이날 이벽(요한 세례자, 30),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42), 정약전(안드레아, 26)·약용(요한 사도, 22)형제, 최창현(요한, 25), 김범우(토마스, 33)·이우(바르나바, ?)·현우(마태오, 9) 형제, 윤유일(바오로, 24) 등에게 세례를 줬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샤를 달레 신부는 조선 땅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에게 베푼 첫 세례에 이렇게 서술했다. “1784년 마침내 조선을 위하여 구원의 날이 밝았다. 그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가톨릭 신앙을 이 나라에 결정적으로 심으셨다. 영광스러운 조선 가톨릭교회는 이때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박해와 변천을 겪어가면서 성장하고 견고해지기를 그치지 않았다.”(상권, 299쪽)
세례받은 조선 청년들에게 베풀어진 은총
이날은 성령께서 우리 민족에게 강림하신 날이었다. 우리 민족 앞에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 날이었다. 비록 교리 지식이 부족한 갓 세례받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베푼 세례이지만 온전하고 합당한 것이었다.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함과 선하심으로 베풀어지는 은총이 바로 세례다. 장애가 있거나 인지적으로 제한이 있는 사람에게도 세례를 주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때와 마찬가지로 세례받는 모든 이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1784년 늦가을~초겨울 무렵 조선 땅에서 실제로 그대로 선포되었고 세례수 안에서 체험됐다. 이날 세례를 받은 10대·20대·30대·40대 초반의 청년들은 광야인 세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가 구세주”라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