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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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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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이나 환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살과 피를 지닌 인간,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따라서 신학은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에 토대를 둔다.


모세는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양을 치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제자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다. 모세가 만난 그 하느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그 하느님을 신학은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인간 이성을 초월한 그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도 있지만 돌파구도 있는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안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함을 통해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해할 때 더 큰 믿음이 생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생긴다. 모르고 믿으면 맹목적이 되지만 알고 믿으면 확실성을 얻게 되고 더욱 순종하게 되고 더욱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신학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 신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움직인다.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은 다르다.


모르고 믿는 사람은 인생 안에서 시련과 고통이 닥칠 때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이런 분이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에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크게 성숙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앎의 세계, 신학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제대로 알면 제대로 믿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학을 하는 이유이다. 신학을 통해 사도들의 하느님 체험, 교부들의 하느님 체험,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 성직자 수도자들의 하느님 체험, 하느님 백성의 하느님 체험을 알게 된다. 이 앎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되고 신앙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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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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