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은 한역 서학서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첫 번째 조선 교회 신자다. 김태 작, ‘이벽’,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
이벽(李蘗). 1754년 경기도 포천 화현리에서 태어나 1785년 가정 박해로 31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조선 천주교 창립 주역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며,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다. 이벽이 가톨릭 신앙을 접한 것은 1770년대 중반 무렵 한역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면서부터다.
북경에 간 사신 통해 전해진 한역 서학서
이벽이 서학(西學)을 접하기 150여 년 전인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한역 서학서가 사대사행원에 의해 조선 사회에 유입됐다. 1631년 조선 사신 정두원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를 만나 다수의 한역 서학서와 권총·망원경·추시계 등을 선물 받았다. 복자 이경도(가롤로)·이순이(루갈다)·이경언(바오로)의 조상인 이수광은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태오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를 소개했다. 이수광은 「천주실의」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조직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이명은 1720년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예수회 수아레즈 신부와 쾨글러 신부를 만난 후 마음을 깨끗이 가져야 한다는 가톨릭교회 가르침이 유교의 그것과 꽤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가환의 작은할아버지 성호 이익은 유교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보유론-補儒論)으로 한역 서학서에 드러난 가톨릭 교리를 이해했다. 이 시기 조선의 유학자들이 서학서를 구해 탐독한 것은 정약용의 말처럼 ‘하나의 유행’이었다. (「정조실록」 권 41. 21년 6월 참조)
단, 홍유한(1726~1785)만은 30대 초반 「천주실의」·「칠극」·「직방외기」·「이십오언」 등 가톨릭 교리가 담긴 한역 서학서를 읽고 그 가르침대로 수덕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를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라 칭송한다.
이벽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탈주자학을 내세운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녹암계 선비들과 어울리면서 서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가톨릭 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779년 주어사 강학 참석이다. 이때 이벽의 나이 25세였다.
이벽은 1783년 말 지인인 이승훈이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 서적을 얻어올 것을 당부했다. 그는 이승훈이 가져온 가톨릭 서적들을 탐독한 후 가톨릭 신앙을 믿기로 했다. 이후 그는 스승 권철신과 이가환, 정약전·약용 형제 등을 찾아가 먼저 가톨릭 교리를 전했다.
이벽은 정약전·약용 형제와 이승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도리이다. 거기에 참된 길이 있다. 하늘의 위대한 천주님은 우리나라 수백만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세상 구속의 은혜에 널리 참여시키려 하신다. 그것은 천주님의 명령이고 우리는 응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 11쪽)
유학자 이벽 마음 속에 떨어진 신앙의 씨앗
17세기 이후 당대 빼어난 조선 유학자들이 한역 서학서를 접했는데 왜 유독 이벽만이 책 속에 담긴 진리를 알아보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샤를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 상권에서 “이벽의 마음속에 보배로운 씨앗이 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렇게도 열성으로 진리를 찾고 있던 이 정직한 영혼에 뜨거운 소원이 실현되기를 마침내 허락하셨다”고 해석했다.(302~303쪽 참조) 영성 신학적 풀이다. 성 다블뤼 주교는 좀더 객관적으로 인식했다. “모든 점에서 탁월한 지능을 타고난 그는, 사물의 이치와 도리의 참된 근거만을 찾았다. 어디서나 열심히 사물의 본질에 침투하려고 했다”(「조선 순교사 비망기」 5쪽)
이벽은 1784년 늦가을과 초겨울 무렵, 한양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선 땅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이 세례를 받은 첫 무리 중 한 인물이 됐다. 그는 이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새로 태어났다. 이제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됐다.(사도 5,29 참조) 이날 이벽과 함께 세례를 받은 권일신, 정약용 등은 이제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삶의 기준과 기초를 하느님으로 삼는 믿음 공동체를 이루었다.
신앙 공동체 세우고 가정 박해로 눈감아
이벽의 세례명이 ‘요한 세례자’인 것은 뜻깊다. 이벽은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 민족에게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리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홍낙민(루카)·최창현(요한)·김범우(토마스) 등을 이끌어 세례를 받게 하고 조선의 중심인 한양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요한 세례자가 그랬듯이 이벽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됐다. 조선의 그리스도인을 탄압한 박해자들은 이벽을 “사악한 무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괴수”라고 낙인했다.(「순교실록」 권2. 순조 1년 3월 11일) 그러자 집안 박해가 심해졌다. 아버지 이달은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기도 했고, 훗날 호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장인 권엄의 압박도 만만찮았다. 고향 집에 갇힌 채 지내던 이벽은 계속된 가정 박해로 결국 생을 마감했다. 교회 기록에는 가족에 의해 독살됐다고도 하고, 페스트에 걸려 8~9일간 앓다 선종했다고 한다.
정약용(요한 사도)은 이벽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의 시를 남겼다.
“신선 같은 학이 세상에 내려왔나 / 높고 우뚝한 풍채 절로 드러나네 / 나부끼는 흰 날개 새하얀 눈 같아서 / 닭과 오리들이 시샘하며 골 부리네 / 울음소리 높은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 맑고 밝음은 풍진세를 벗어났네 / 갈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려 / 허전하고 괴로운 이 내 마음 슬프게 하네.(「여유당전서」 1집 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