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선 아녜스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6. 황석영 소설 「할매」
구글 제미나이 제작
나의 일터인 서강대학교는 건물 명이 인물 명이다. 주로 일하는 건물은 아루페관(AR관)과 김대건관(K관)인데 각각 페드로 아루페 신부·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이름이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이어서 이름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는데, 그는 스물다섯 해를 살다가 순교했다. 불과 스물다섯 해였다. 어느 날인가 문득 깨달았다. K관의 ‘K’가 그 젊은 순교자의 이름이었구나. K관에 수년간 드나들면서도, 건물을 칭할 때 수백 번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살았다.
내가 접한 가톨릭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다. 조선 후기가 배경인 소설·드라마·영화 등에서는 반드시 천주교 박해가 다뤄졌고 어김없이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박해와 순교를 이야기로 읽는 것이 문득문득 죄스러웠으나, 이렇게 후손들이 순교의 역사를 알아가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놀라웠던 것은 10대 초반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넓게 펼쳐지는 순교자들의 나이였다.
황석영 소설 「할매」는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나무가 주인공인 독특한 소설이다. 할매는 소설의 주인공인 팽나무 이름인데, 나무를 중심으로 수백 년을 관통하는 생명들의 서사가 이어진다. 무려 600년간 수많은 동식물이 나고·살고·죽는다. 그 서사 속 여러 생명 중 나를 몰입하게 한 것은 단연 인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유 방지거 신부와 배동수 환경 지킴이. 둘은 각각 천주교 순교자의 후손·동학 운동가의 후손이며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며 무엇이라도 믿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들었던 농민들의 고단한 인생을 절절히 느꼈다.
유 방지거 신부의 노년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시작되고, 설명된다. “이제 그는 자기 말처럼 거의 ‘산신령’급으로 늙어버렸다.” 산신령급으로 늙은 사제는 은퇴 후 고향과 다름없는 군산에 돌아가 환경·평화 활동가로 일한다. 은퇴 전에도 노동 운동·환경 운동 등에 힘썼는데 산신령급으로 늙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교회 밖, 세상 모든 곳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거침없이 노장의 실력을 발휘한다.
책의 마지막에 배동수는 유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기 귀한 분이 살아계십디다.” “저는 수라 갯벌 지킴이 할 테니, 신부님은 그 할매 나무를 지키세요.” 할매 나무는 군산 하제마을에 실제로 존재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책의 말미에 신부는 할매 나무에게 가서 이러한 소리를 듣는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책은 이 문장으로 끝이 난다. 문장을 읽었을 때 깊은 전율이 느껴졌다. 이놈아. 산신령급으로 늙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너를 기다렸다. 나에게는 그렇게 들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아빠가 길에 붙은 향우회 플래카드를 보고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고향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지만 고향 향우회를 한다니 함께하고 싶다고. 회비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그거 내고 참여하고 싶다고. 아마 아빠의 주머니 사정상 회식비 정도는 부담 없이 낼 자신이 있어 당당히 전화를 거셨던 것 같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일흔이 넘은 회원은 받지 않겠다는 거절. 어림잡아 7~8년 전 이야기이니 지금은 향우회 규칙이 달라졌을 수 있다. 사회가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 아빠의 건강과 기세는 시켜주면 회장이라도 할 태세였기 때문에, 향우회 가입을 나이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말하는 아빠의 말에 우리 모두 실소했다. 그리고 “어머, 정말이야? 너무하네. 뭐 그런 규칙이 다 있대?” 그렇게 아빠 편을 들어주며 아쉬움을 달래주고 신속히 잊기로 했다. 속상하니까. 하지만 실은 시간도 많고 연륜도 많고 밥 한 끼 정도의 돈은 흔쾌히 쓸 수 있는 백전노장의 갈 곳 없는 기세를 어찌해야 하나, 막막함도 느꼈던 것 같다.
소설 「할매」 속 노장의 실력과 노장의 용기, 노장의 역할과 자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노장의 결말을 이보다 더 장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적재적소에 노장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까. 레지오 마리애에 속한 노년 단원들의 단단한 활동을 보며, 노인 대학 전시회에 올려진 각종 결과물을 보며, 돋보기를 끼고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 속 노년들을 보며 내 신앙의 마무리를 상상한다. 가족 안에서 어른의 자리가 있듯 교회 안에서도 연장자의 자리가 있다. 외적인 신앙생활도 내적인 영성생활도 마무리할 때가 올 텐데 나는 어떤 상상을 해야 하나. 나의 자리는 내가 만들 수도 있겠고 누군가 만들어줄 수도 있다. 어쨌든 단단한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마련하는 자와 참여하는 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모두 노년의 자리에 대한 적극적 상상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