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으뜸 사도인 베드로처럼 위기 때 주님을 부인했으나 회개하고 마지막 순교로 그리스도를 증언한 조선 교회의 반석같은 존재이다. 이승훈 베드로 초상화.
이승훈(베드로)은 영조 32년인 1756년 한양 반석방 약현(오늘날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나 염초교 부근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낸 이동욱이고, 어머니는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의 딸이다. 이가환이 그의 생질이다. 또 이승훈은 정약전·약종·약용 형제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해 이들과 처남·매부 사이다. 그리고 1868년에 순교한 이신규(마티아)와 이재의(토마스)가 그의 아들과 손자이다.
그는 일찍부터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을 받아 서학서를 접했고 특히 수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암브로시오)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1780년 25세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고, 1790년에 의금부 도사, 이듬해에 평택현감을 지냈다.
이승훈은 정조 7년인 1783년 말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당을 방문해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가톨릭 교리를 배웠고, 귀국 직전인 1784년 봄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라몽 신부는 아직 교리 지식이 부족해 세례를 반대했던 여러 신부와 달리 이승훈에게 큰 기대를 걸며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성사를 거행했다. 그라몽 신부는 “저는 하느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1790년 6월 23일자 그라몽 신부 서한)
신앙 공동체 일궜으나 연이은 박해에 배교도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 이승훈은 귀국 후 1784년 겨울 한양 수표교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사도)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그의 나이 28세 때이다.
이때부터 이승훈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됐다. 이승훈은 조선 교회 지도자로 1785년 봄 서울 명례방 장례원 앞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정약전·약종(아우구스티노)·약용 형제, 권일신·권상문(세바스티아노) 부자, 최인길(마티아), 이총억, 이윤하, 이기성 등과 함께 사순 시기 관련 예절을 하다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다가 석방됐다. 이를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이승훈은 또 1787년 성균관 아래 동반촌 김석태의 집에서 처남 정약용과 함께 교회 서적을 집중 연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모임을 하다 이기경에게 발각돼 곤욕을 치렀다. 이를 ‘정미반회사건’이라 하는데 이 일로 가톨릭을 반대하는 척사 여론이 크게 일어났고 1801년 신유박해의 빌미가 됐다. 정조는 1788년 1월 서학서 반입을 금하고 소각을 명했다.
마침내 이승훈은 1791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으로 체포돼 관직을 잃고 만다.
교회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이 터지자 이승훈은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됐다. 집안과 척사론자들의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교회 서적을 불태우고,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한다는 글과 시를 지었다.
북경 선교사에게 편지 전해 성직자 영입 추진
하지만 이승훈은 이러한 박해에도 교회를 위해 책임을 다했다. 그는 정약용,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가성직제도를 운영하며 신부로 활동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곧장 중단했다. 이후 그는 윤유일(바오로)을 북경 교회에 밀사로 보내 성직자 영입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윤유일을 통해 그라몽 신부에게 편지를 전하며 “자신이 집안 박해로 자유롭지 못해 교우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책임질 수 없다며 그 책임을 면제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기에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1790년 7월 11일자 편지)
이러한 노력으로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고,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주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1795년 6월 27일에 일어났다. 이 일로 이승훈은 한 달 후 충청도 예산으로 유배 갔다가 다음 해 봄에 풀려났다.
‘사학 원흉’으로 처형된 이승훈, 순교자로 인정
1801년 3월 23일 이승훈은 ‘사학 원흉’으로 체포됐다. 그는 의금부에서 8일간 6차례 심문을 받고,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날 이승훈과 함께 최창현(요한), 정약종,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토마스), 홍낙민(루카)이 순교했다.
이승훈의 시신은 처형된 지 3일 후에 그의 집으로 옮겨졌고, 친구 심유만이 홀로 문상을 했다. 그의 시신은 여종 이갑례에 의해 인천 만수동 반주골에 매장됐고, 1981년 11월 28일 파묘돼 다음날 경기도 광주 천진암 성지에 이장됐다.
이승훈의 순교 여부에 대해 황사영(알렉시오)은 백서에서 ‘판단을 유보’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 주교와 샤를 달레 신부는 ‘배교자’로 죽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한국교회사학자 주재용 신부는 이승훈의 형을 확정 짓는 결안과 공서파들의 상소문, 후손 대대로 신앙이 전래한 점 등을 근거로 ‘순교자’라고 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조광 교수는 ‘교회를 버린 자’(기교자-棄敎者)라 주장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는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이승훈을 순교자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