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간병인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는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일만 열심히 했다).
3)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4) 친구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그때의 친구가 보고 싶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 살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과연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요? 그보다 생각, 말과 행동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정리한 관습적인 조문의 수는 모두 613개(긍정 명령 248개, 금지 명령 365개)입니다.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깜짝 놀라고, 어쩌면 불가능한 말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살인의 뿌리가 되는 성내고(내적 감정), 바보라고 부르며(언어 폭력), 멍청이라고 하는(인격 모독) 행위까지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행위인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와의 화해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간음 역시 물리적 행위 이전에, 마음속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여자를 소유의 대상이나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모세 율법은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락했지만, 배우자를 버리면 그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근원적 가르침을 전달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아예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평소의 말에 거짓이라는 악이 섞여 있다는 증거이기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고 죄라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죄를 만드는 뿌리인 분노, 음욕, 거짓 마음 등을 마음에서 지우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높은 기준을 우리 힘만으로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인이 되라고 지금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지키기 힘든 주님의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삶의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행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오랫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어떤 여행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출발지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여행 중인 우리는 이 여행을 마치면 출발지인 고향으로, 즉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중인 지금 삶에서 계속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