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5년 3월 어느 날 명례방 장악원 앞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갖고 있는 초기 조선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형조 금리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초기 조선 교회 중심,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1784년 겨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있었던 두 번째 세례식에서 영세한 김범우(토마스, 당시 34세)는 이듬해 봄 명례방 장악원 앞에 있던 자기 집을 가톨릭 신앙 공동체 모임 장소로 내놓았다. 마치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가 초대 교회 사도들과 신자들을 위해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는 자기 집을 성찬례와 기도 모임 장소로 제공했던 것(사도 12,12 참조)처럼 김범우도 기꺼이 그러했다.
김범우의 결단으로 초기 조선 교회의 중심은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이벽(요한 세례자)과 이승훈(베드로), 정약전·약용(요한 사도) 형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그의 아들 권상학·상문(세바스티아노), 최인길(마티아), 최필공(토마스), 최창현(요한),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윤지충(바오로), 허속, 변득중, 이윤하, 이총억, 이기성, 정섭 등이 출입하면서 김범우·이우(바르나바)·현우(마태오)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가톨릭 서적을 읽으며 교리 공부를 했다.
이들 가운데 양반들 대부분은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제자들이거나 혈족, 인척이었다. 이총억(당시 21세)은 이기양의 맏아들이자 권철신의 맏사위다. 이기성은 이기양의 동생이고, 정섭은 이기양의 외종이다. 또 이윤하는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의 사위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10~20대 나이로 1779년 주어사 강학에 참여해 가톨릭 서적을 탐독했다.
이기양과 그의 5대손 이만채가 편찬한 척사론서 「벽위편」(闢衛編)은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행해진 초기 신앙 모임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785년 봄, 지도층 신자들은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이승훈이 먼저 서적을 펼쳐 들고 좌중에게 주요 교리를 읽어 내려갔다. (?) 집주인 김범우를 비롯하여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과 아들 권상문,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모두 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 교우라 일컬으면서 예법만은 아주 밝았다.”(‘추조적발사건’편에서)
명례방 신앙 모임은 활발했다. 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은 신분 구별이나 남녀 차별 없이 하나가 됐다.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그들은 서로를 “교우”(敎友)라 부르며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나갔다. 명례방을 중심으로 신앙 모임을 한 초기 조선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는 초기 교회 모습을 그대로 이 땅에서 이루었다.
이단·사교로 위정자들에게 배척된 가톨릭 신앙
가톨릭 신앙이 빠른 속도로 조선 사회에 퍼지자 이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이들 또한 생겨났다. 이벽의 노스승이며 권일신의 장인인 순암 안정복은 “계묘년(1783년)과 갑진년(1784년) 사이로부터, 재기가 있다는 젊은이들이 천학의 주장을 펴서 마치 상제가 친히 내려와 알려주고 시킨 듯이 하였다. 아! 일생 동안 중국 성인의 글만 읽다가 하루아침에 서로를 이끌어서 이단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고 나무랐다.(「천학고」(天學考) - 정민 교수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126쪽)
이승훈의 외숙부 이가환의 종조부 이서는 “오랑캐 놈들이 전해 준 이단의 학문이 우리의 올바른 도덕을 빼앗아 갈까 두렵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의 정학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사악한 술법이 어찌 맹수보다 격렬해지지 않겠는가”라며 가톨릭 신앙을 배척했다.(차기진, 「고난의 밀사」 42쪽)
주자학만을 정학(正學)으로 수용해온 조선 왕조 위정자들도 신생 조선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톨릭 교리가 조선의 통치 이념과 사회 질서의 토대를 통째로 뒤흔드는 도전으로 간주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오랑캐의 가르침이라고 인지했다. 그래서 형조와 포도청에서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금리와 순라군들을 풀어 사교를 퍼뜨리는 이들을 단속했다.
김범우의 집에서 모임 중 적발된 신앙 공동체
이 와중에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는 여전히 신앙 모임이 열렸다. 1785년 3월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벽위편」은 이날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을사년 봄 이승훈은 정약전·약용 등과 함께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그때 이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서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삼 형제, 그리고 권일신·상문 부자가 모두 스스로를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았는데,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 주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법보다 더 엄격하였다. (?) 형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들어가 보았다.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썼으며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해서 체포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몇 가지 물건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