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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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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안젤리코 작 ‘산상수훈’, 1440~1442년 경.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은 다양하였다. 율법은 당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한 구속력을 발휘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시대와 세상의 도래를 절실히 염원했던 비주류층과는 달리, 율법의 토대 위에 주류층으로 분류되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회 변화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고수하였다. 이들은 하늘 나라를 전면에 내세운 복음 선포 중 율법과 관련된 진술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 국면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고 단호히 표명하였다. 이는 두 가지의 결과를 도출하였는데, 첫째는 ‘불필요한 오해의 완화’이고 둘째는 ‘율법 정신의 심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2.28.32.34)는 반복 문구가 첫째와 둘째를 구분하고 있다. 이 문구 앞에는 율법 조항이 그대로 인용되고, 뒤에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마르 1,27 참조)이 전개된다.

새로운 가르침은 율법 준수의 의무에 더해 별도의 과제를 부가하는 듯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행위의 죄’와 더불어 ‘입을 통한 발언의 죄’, 더 나아가 ‘마음과 생각의 죄’까지로 확대된다. 살인·간음 행위와 대등한 수위로 분노와 저주의 발언, 성욕에 노출된 마음과 생각이 죄의 범주에 포괄된다. 화해와 용서의 실행 없이 종교 예식의 참여는 무의미하고, 죄짓게 하는 눈·손과는 과감하게 절연해야 하며, ‘예’와 ‘아니요’란 답변 외에 죄악의 온상이 되는 말을 절제하라고 요청한다. 다음과 같은 물음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리스도인은 ‘고차원의 도덕 생활’을 실천해야 하는가? 이 말씀은 ‘권고’(자발적 선택)인가, ‘계명’(보편적 의무)인가?

눈에 ‘보이는’ 행동의 근저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비가시적 영역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심리학은 마음과 생각의 작용 구조와 원리를 탐색하는 반면에 신앙은 마음과 생각 너머의 신 존재를 고백하게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죄’(마음과 생각의 죄)를 인정하게 만든다. 인력(人力)으로 불가능한 화해와 용서, 완벽한 차단(눈·손과의 단절) 없이 불가피한 유혹은 신력(神力)의 필연적 요청을 수용하게 한다. 가시적 분야에 전념하여 현상의 근원을 연구하는 과학은 논리적·체계적 해명을 시도하지만,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은 ‘예’와 ‘아니요’ 사이에서 결단하게 한다.

종교는 신에 대한 ‘신앙’과 함께 신이 부여한 ‘도덕’을 제시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 도덕 생활은 인간을 신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는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고차원의 도덕 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하늘 나라)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완성하기 위한 단계적 과정이다. 도덕 생활은 권고와 계명 가운데 양자택일이나 완덕 경지의 달성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로마 8,37)하고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고 명하신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1요한 4,8)임을 자각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다. 도덕 생활의 출발과 종결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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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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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깨어날 때 주님의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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