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5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과도함도 부족함도 없는 중용을 통한 행복 추구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특히 미국 소비자 기술협회가 주관한 ‘2026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는 피지컬-AI를 대표하는 로봇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동작이나,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다양한 능력을 선보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개월간 벌어진 변화는 과거 한 세대가 겪었던 변혁에 맞먹는다. 기술이 예측을 추월했고, 투자 시장에 전례 없는 자금이 몰려들며, AI 혁명은 ‘가능성’에서 ‘현실’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이제 과도한 육체노동이나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AI를 통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행복’이 증대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곳곳에서 위태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많은 이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AI의 답변이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자주 빠진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더욱이 AI와 상담을 지속하던 학생은 그 충고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I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전력 수요 때문에 사라져가던 원자력발전소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특수가 버블이라는 의심도 나타나고, AI의 발전으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며, 범용지능(AGI), 초지능(ASI)까지 발전하면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찬성이나 반대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찾기 위한 덕을 ‘중용’이라고 불러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개념의 수용과 변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획득된 덕’에 적용되는 어떤 공통적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간’, 즉 중용(medium)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I-II,64,1) 도덕적 덕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습성’이며, 과도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습(vitium)이 발생한다.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지나치게 적어 무모해지는 것도, 지나치게 많아 비겁해지는 것도 모두 악습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과 대상, 행위자의 능력에 상응하는 ‘마땅한 정도의 두려움’을 지키는 것이 용기의 중용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이 중간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나 ‘미지근함’이 아니라, ‘이성의 중용(medium rationis)’을 의미한다. 무엇이 중용인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고 상황 판단력이 있는 ‘현명(prudentia)’의 덕을 가진 사람이 이 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들과 중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절제와 용기 같은 덕들은 정념의 내적 조절을 통해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규정되지만, 정의의 덕은 사물과 몫의 객관적 분배에서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갖는다. “정의 안에서 이성의 중용은, 정의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한에서, 사물들의 중용과 동일하다.”(I-II,64,2) 이처럼 토마스는 도덕적 덕의 중용을 정념 중심의 주관적 측면과 정의의 객관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여 정교하게 구분한다.


인공지능 혁명에 큰 기대감도 있지만 ‘기술에 지배당할 우려’ 두려움 확산


중용의 덕으로 올바른 이성·윤리적 성찰 균형 찾고 모두의 행복 증진 추구 해야


중용과 다른 덕들과의 연결


여기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의 궁극 판단 기준을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에 두는 점에서 그 이론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다. 그에 따라 ‘현명’이라는 덕은 단순히 근시안적 실용 이익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곧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개별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덕이다. 따라서 도덕적 덕의 중용을 판단하는 궁극 기준은 ‘어떤 것이 최종 목적의 달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현명’의 덕은 도덕적 덕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컨대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도덕적 덕 또한 현명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한 덕에서 완전한 중용을 이룰 수 있으려면, 다른 덕들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덕 개개의 균형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덕의 연결(connexio virtutum)’까지를 강조한다.(I-II,65,1)


지성적 덕으로 확대된 중용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먼저 지성적 덕의 경우, 토마스는 진리를 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성의 지나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긍정’이며, 부족함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부정’이다.(I-II,64,3) 그러므로 지성적 덕의 중용은 AI 시대에 종종 망각되고 있는 ‘사물 자체와의 정확한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단지 논리적 형식이나 계산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정직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뜻한다.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중용은 ‘미지근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넘어서, 올바른 이성(현명)과 최종 목적(하느님)에 비추어 가장 정확한 선을 선택하는 덕이다. 이제 각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중용’의 덕이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열광으로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하던 러다이트 운동식의 무조건적인 반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토마스에 따르면, 중용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성이 끊임없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성찰 없이 최대한 빠른 상용화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제기된 위험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개발자나 투자자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길이야말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2-2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2. 25

에페 4장 32절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