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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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서은(에드부르가, 서울대교구 고척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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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내가 조금은 유별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궁금한 게 참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했던 건,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친구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대개 눈살을 찌푸리거나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태어났지!’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 성에 차지 않는 대답에 나는 선생님들과 부모님께도 질문을 거듭했다. 어른들의 대답은 나름 다양했다. ‘신이 너를 포함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 ‘그게 궁금하면, 이 책 읽어볼래?’와 같은. 하지만 그 모든 답변은 나의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진 못했다.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나의 탄생에 대해서.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셨다. 그러다 곧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이런 게 궁금한 내가 조금은 별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시선도 떠올랐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나를 거슬러 올라가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잊히는 듯했던 그 질문은 삶이 꽤 지겹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뜻 모를 회의감이 나를 다시금 간절히 묻게 한 것이다. 이때는 세상에 멋대로 던져졌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뱉고 나면 퍽 이상하게 들려 혼자 곱씹어야 했던 내 생각은 쉴 틈 없는 일상에서 점차 부정적으로 흘렀다. 허리가 부러질 듯 앉아서 공부하고 집에 가면 또 자습을 이어가야 했다. 성적을 잘 받지 않으면 부모님과 선생님께 혼이 났다. 선생님은 성적이 좋은 아이와 좋지 않은 아이를 차별했다.

친구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밟고 서야 할 경쟁자였다. 작은 소음에도 서로를 힐난할 정도로 예민했다. 결국 그즈음 같은 반 친구가 성적 스트레스로 손목을 그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눈으로 목격한 첫 자해의 현장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그 친구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반 친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마지막 정도는 내가 결정하고 싶었어.’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모두에게 질문을 건넸다. 우리, 고작 이렇게 살려고 멋대로 태어난 걸까?

친구의 질문은 일렁이던 나의 마음에 던져진 돌과도 같았다. 스스로 죽으려고 했던 그 애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무서우면서도, 어떤 날에는 삶의 마지막만큼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참을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음에 들이치는 파도를 견디다 못해 결국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이대로 잠겨 죽기는 싫다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불쑥 치솟는 충동은 그렇게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가두어졌다.

온통 새카만 나만의 세계는 안온했지만 때로는 두려웠다. 어디가 낭떠러지고 길인지 알 수 없는 불안에 떨었다. 그러다 불쑥 던져진 친구의 질문처럼 무언가가 그 어둠을 뚫었다. 그 사이로 빛이 샌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집 근처 선생님의 오피스텔에서 설렁설렁 영어 과외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일상에 지쳐 최소한의 사회성도 없던 나는 선생님과도 대화하기가 귀찮았다. 그런 나를 파악했는지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셨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선생님의 노력으로 조금은 자연스러운 사이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대뜸 종교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와 표정에서부터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혹시 천주교라는 종교 아니?”

나는 교회와 성당도 가끔 헷갈렸기에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렸을 적 친가 친척들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본 적은 있었다. 그때 고모들이 나를 개신교도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그러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 그 후로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천주교는? 일가친척 통틀어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외가는 할머니께서 불교 신자셨으니,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표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나는 살짝 경직된 채 잠자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조금씩 풀어내시는 말 중에 순간 나의 귀를 사로잡은 내용이 있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그 이유가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니, 이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유치한 마음으로 부모님 이야기부터 꺼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셨다.

“당연히 부모님이 서은이를 낳아주셨지. 그것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그런데 그 이전부터 너를 사랑하셨던 분이 있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신.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 정의로운 신. 그런데 나는 그 무렵 부모님이 나를 어긋난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런 분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솟았다.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철없는 투정이었다. 나는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을 원망했듯이 신을 원망하기도 쉬웠다. 점점 굳어가는 내 표정을 보셨는지 선생님께서는 거기까지 말씀하시고 수업을 마무리하셨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 자꾸만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사실은 내가 초월적인 존재를 필요로 했음을 깨달았다. 타의로 인해 태어난 인간끼리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게 싫었다. 적어도 신이 있다면, 미움의 화살을 서로가 아니라 그에게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 이전에 신이 있었다니, 왠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흥미로운 접근이었다. 그래서 다른 수업 날에는 질문거리를 잔뜩 정리해서 갔다. 선생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는데, 공격적인 내 질문들에도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면 진화론이 거짓이라는 건가요?’ ‘하느님이 있는데 왜 세상에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예요?’ 같은.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신 답변은 모두 ‘사랑’이라는 알쏭달쏭한 단어로 귀결됐다. 고통과 사랑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내가 불만 어린 표정을 풀지 않자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졸업하면 성당에 한번 나와보라고 권유하셨다. 결국 종교 이야기의 끝은 전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 정말이지 신기한 이끌림이었다.

그 후는 똑같았다. 나는 여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지만,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그 희미한 빛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힘들고 삶에 회의를 느낄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가서 괴롭혔다. 그런데 그만큼 선생님의 인내심도 끝이 없었다. 그러자 공격적이었던 나의 질문들은 점차 누그러졌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뭐든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았다. 인간이 아무리 찔러도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튕겨내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는, 그런 신기하고 큰 스펀지. 나는 그 옆을 맴돌며 어린아이 같이 툴툴댔다.

이렇게 어느 날 내 삶에 불쑥 나타나신 하느님과의 만남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때가 됐다고 여기셨는지 아직 세례도 안 받은 나를 어느 한 성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손을 잡고 이끌린 곳은 성당 내 성물방이었는데, 묵주 팔찌를 하나 고르라고 하셨다. 단순한 팔찌가 아니라는 묵주는 반짝반짝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예비신자도 아닐 때 묵주 팔찌를 선물 받게 되었다. 손목에 걸려 달랑거리는 묵주를 보며 문득 손목을 그었던 친구의 상처 자국이 생각났다. 함께 그 친구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조용히 바랐다. 이게 기도라는 건가, 제법 어색해하면서.

그 신기한 이끌림이 알고 보니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나는 마치 하느님께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계속해서 성당으로 이끌렸다. 가톨릭계 대학교에 진학해 학교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모두 받는 은총을 누렸고, 학교에서 성가대로 봉사할 기회가 있었으며 청년성서모임 공부를 마치고 대표 봉사자 등을 거쳐 지금까지 꾸준히 봉사의 자리로 초대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어둠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내가 문을 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를 잡아먹을 듯 들이쳐 마음속으로 숨게 했던 파도는 어느새 잔잔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문득 그 위에 내리쬐는 햇볕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의문에서 이제는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의 그늘은 제법 끈질겼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갑자기 차에 치인 것처럼 우울증이라는 새로운 친구가 코로나 19와 함께 내게 들이닥쳤다. 잠시 느꼈던 해방감이 나의 얄팍한 신앙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느님을 만난 후엔 우울감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신앙생활이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간과했다. 나의 신앙은 모래 위에 세워진 성과도 같았다. 파도 한 번에도 위태롭게 쓸려나가던 모래성은 해일을 만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얄팍한 신앙이 깨지자 갑자기 일상생활이 어려워졌고, 잊고 지냈던 트라우마 같은 기억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기억 끝에 친구의 손목에 그어졌던 흉터 자국이 있었다. 그 자국이 이번엔 마치 내 마음에 새겨진 것 같았다.

성난 파도는 해일이 되어 미처 숨지 못한 나를 덮쳤다. 나는 구명정 하나 없이 그 바다를 부유했다. 어두운 바다는 온도만큼이나 뼈아프고 시린 깨달음을 주었다. 삶에 던져진 이유를 찾던 열여덟의 내가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단 한 뼘도 성장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점점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생겼다. 결국 병원을 방문한 나는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다. 병원도, 진단명도, 약도 모두 거북했지만,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점차 마음속 거친 파도는 잠잠해졌지만, 나를 스치는 따끔한 통증이 있었다. 물만 닿아도 아플 만큼 벌어져 있는 상처 자국, 오래전 보았던 친구의 손목 상처와 똑같은 모양의 자국이 내게 남겨졌음을 보았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닥친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느님께 조금은 절박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치유를 위해 종교를 믿는다는 말이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픈 걸 알고 나자 신앙생활에 정성을 쏟는 그 마음을. 다양한 가톨릭 서적을 읽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열심히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봉사에 임했다. 그래도 공허함은 여전했다. 나는 이따금 내 마음의 바다에 뛰어들어 벌어진 상처의 고통을 안고 죽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날 어둠 속에서 본 빛줄기는 내가 꾸며낸 환상이었던가. 아니, 그랬다면 그때의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 없었다. 초월적인 존재를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도 않았을 테고, 손목의 묵주 팔찌를 돌리며 결국 자퇴한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을 테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지도 않았을 테고,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 눈물 흘리지 않았을 테다. 철부지였던 내가 바뀔 수 있었던 건 그래도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한 의심이 있었다. 주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약하기만 한데. 나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이토록 괴로울 리 없다는, 지극히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기도를 통해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마음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그늘을 안고 피정과 연수를 찾아다니던 무렵이었다. 어디로 가면 당신이 계실까, 어떻게 하면 당신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단 한 번만 그 빛을 다시 볼 수 있다면, 하고 정처 없이 떠돌던 날들. 그렇게 헤매다 한 수도원에 발길이 닿았다. 수도원은 매우 고요하고 정갈했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라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수도원 복도를 걷다 경당의 십자고상의 예수님을 살짝 엿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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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는 청년들에게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서툰 나 또한 함께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쉽고 간단한 설명이었다. 말씀을 읽고 와 닿는 구절에 머물러 본 후 그 장면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날 내가 읽고 묵상한 성경 구절은 요한 복음 11장이었다. 나는 아까 기도드렸던 경당으로 이동해 조용히 기도에 집중했다. 11장의 내용 중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만나러 다시 베타니아로 가신 뒤 그곳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만나시는 장면에 머물렀다. 예전에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다시 조용히 이 부분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문득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띄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믿음. 그 순간 예수님의 음성이 내 마음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어떤 다른 존재가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주님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그런 직접적인 만남은 성인, 성녀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지금 내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시는 이분은 누구실까. 예수님께서는 앞서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그간 뭐라고 응답했나. 영원히 사는 삶 따위는 필요 없다고, 나는 왜 당신을 믿어도 이렇게 죽지 못해 살아가느냐고 따졌었던가. 그러나 따져 들었던 대상이 지금 내 안에 계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정작 나는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과연 무엇을 믿었나. 내가 정말 당신의 사랑을 믿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느냐?’

그 음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나는 어느새 눈을 꼭 감고 주님께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 그 어떤 사랑도 믿을 수 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탄생조차 괴로워했던 저를, 어리석게도 당신의 사랑을 믿지 않고 쉽게 삶을 등지려는 저를 돌보아주세요. 곧 눈가가 촉촉해졌다.

‘더 이상 괴로워 마라. 그저 너의 마음을 나에게 맡겨다오.’

그분의 음성은 거짓말처럼 따뜻했다. 나는 마음속에서만 들리는 예수님을 붙잡고 싶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께 제 마음을 드릴 수가 있나요? 도와주세요. 그분 앞에서 정녕 나는 어린아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음속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벌어진 상처에 괴로워하며 헐떡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상처의 부위는 손목이었는데, 그곳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10년 전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던 친구의 모습과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똑같이 피를 흘리면서. 나는 그제야 그 친구가 상처 입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 친구가 생각났다. 죽지 않고 잘 있을까, 그래도 열심히 기도했는데.

장면 속의 나는 그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엎어져 있는 내 어두운 주변 곁으로 희미한 빛이 생겨나더니 그 형태가 곧 예수님으로 변했다. 그 따뜻한 눈빛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손목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무릎을 꿇고 내 옆에 앉으시더니 피가 흐르는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으셨다.

‘상처 입은 마음이어도 좋다. 나에게 맡겨다오.’

그러자 나는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주님을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저여도 괜찮을까요, 예수님.’

이렇게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도요? 예수님께서는 대답 대신 지그시 웃으시더니 두려워 떨고 있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셨다. 그분 품에서 아이처럼 울던 나는 문득 내 손목의 상처가 당신에게로 옮겨간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손목에 제 상처가 생겼어요.’

예수님은 이번에도 내게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하셨다. 그렇게 나를 보며 웃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 장면에서 깨어났다. 나는 내가 본 모습처럼 울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 눈물이 흥건했다. 눈물을 닦으며 조금 진정한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간 수없이 당신의 사랑을 믿어 달라고 하셨음을 깨달았다. 그 음성을 얼마나 많이 외면했던가.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내가 믿는 것뿐이었는데. 십자가 위에서도 나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예수님인데.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상처를 보아다오. 내 손목의 상처는 내 상처가 아니었다. 바로 당신의 상처였다.

어떤 견고한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가두던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 무너짐 사이로 어둠은 걷히고 주님의 빛이 비쳤다. 벽이 조각조각 부서진 자리에 어느새 예수님이 서 계셨다. 빛은 사실 이미 내 안에 계셨음을. 나의 사랑을 믿어 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나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예수님,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안아주시는 예수님?. 그분은 그 모든 모습으로 처음부터 항상 내 안에 계셨다.

‘울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하셨다. 그 따스한 음성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렇게 내 첫 관상기도는 강렬한 체험으로 끝이 났다. 왜 태어났는지 애타게 묻던 나는 결국 그 빛으로부터 다시 태어났음을, 마침내 내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 눈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며칠간은 현실인지 구분조차 힘들었고, 무엇보다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그 수도원에 초대해주셨던 수녀님께 이 체험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 체험을 전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는데, 수녀님은 그런 나를 보시고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간의 내 이야기까지 모두 들으신 수녀님께서 이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느냐고 물어보셨다. 내 두 눈과 마주하는 수녀님의 눈동자에 다시금 예수님이 어른거렸다. 그날 이후로 예수님께서 성큼 내 곁으로 다가오신 느낌이었다. 아니면, 둔하던 내가 이제야 모든 곳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았거나. 찰나의 망설임이 스쳤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미소 지으셨던 것처럼 수녀님도 지그시 웃으시더니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 태어난 거 축하해, 서은아.’

예수님께서는 탄생과 삶의 무상함에 몸부림치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시어 새 삶을 선물해 주셨다. 그러나 그 삶 역시 태초부터 당신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믿음을 고백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이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내가 이제야 당신으로부터 생겨났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결코 늦었다고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나에게 알맞은 때에 불러주셨음 또한 알기에. 가장 찬란한 시간이라고 하는 10대와 20대를 어둠 속에 갇혀 보냈더라도 아쉽지 않은 건, 그저 당신의 사랑을 믿게 되었음에 감사하기 때문이리라.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내 앞에 나타나시어 감싸안아 주시며 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시는 듯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이제는 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당신을 믿는 일,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일, 절망하고 아픈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일? 그러나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또한 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생겨났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수없이 넘어지고 또다시 자신의 어둠에 갇힐 수도 있음을 안다. 이토록 강렬한 체험을 하고도 수없이 나의 부족함에 걸려 넘어졌던 나를 본다. 이웃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고, 다시금 회의감에 빠졌던 나날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는 영영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상흔이 내 안에 남았음을 안다. 그날 당신에게로 옮겨갔던 나의 상흔은 결코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함을 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 상흔을 통하여 나를,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안다. 그렇기에 영원토록 당신의 사랑이 모든 죽음을 이기리라. 오직 사랑, 사랑만이 나를, 또 우리를 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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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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