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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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유로 형벌 받고 선종한 첫 번째 증거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9) 김범우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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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는 한국 교회에서 신앙 때문에 처벌을 받고 선종한 첫 번째 증거자이다. 조영동 작, ‘김범우 토마스’, 1984년, 주교좌 명동대성당.


모임 중 체포돼 홀로 투옥된 명례방 집주인

1785년 3월 어느 날, 한양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하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풍속을 단속하던 금리들에게 체포됐다. 집주인 김범우(토마스)를 비롯해 이벽(요한 세례자), 이승훈(베드로), 정약전·약용(요한 사도) 형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윤하, 이총억 등이 중부 서린방에 있는 형조 관아로 끌려갔다.

형조 판서 김화진은 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조와 우의정 채제공, 대사간 이헌경이 아끼던 촉망받는 남인계 젊은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형조 판서는 고심 끝에 사대부가 자제들을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인 김범우만 장소를 제공한 집주인이란 이유로 투옥했다.

김범우만이 전옥서에 갇혀 옥고를 치르자 권일신과 아들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이 형조를 찾아갔다. 이들은 판서 김화진에게 “우리도 모두가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운명을 우리도 같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빼앗은 성상과 서적들은 여기에 놔둘 수 없는 중요한 물건이니 저희에게 돌려주시오”라고 요구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381쪽, 이만채 「벽위편」 참조)

형조 판서는 크게 노했으나 사건을 확대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단 사학에 물들지 마라”고 꾸짖고 그들을 또다시 돌려보냈다.

김범우와 함께 역관이었던 최인길(마티아)도 형조로 가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 형조 판서는 최인길을 전옥서에 가두었으나 트집 잡을 만한 단서가 없어 며칠 후 풀어주었다.

김범우는 열흘 이상 옥에 갇힌 채 몇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조선 사람 모두가 참된 신앙의 길로 인도되어야 한다”며 배교를 거부하고 가톨릭이 이단 사학이 아님을 증언했다.

형조 판서는 김범우에게 충청도 단양 도배(徒配)를 선고했다. 김범우에게 수갑과 12㎏이나 되는 칼을 채웠다. 전옥서에서 나온 그는 숭례문을 지나 청파역을 거쳐 노량나루에서 배를 탔다. 거리에선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은 죄인이요?”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사령들은 “요즘 세간에 떠도는 바로 그 천주학쟁이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김범우가 동재기(현 동작동)와 서리풀(현 서초동)을 거쳐 말죽거리(현 양재동)에 이르렀을 때 동생 형우와 관우, 장남 인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우는 사령들에게 엽전을 찔러주면서 정배지까지 가는 동안 여비로 쓰고, 형님에게 음식이라도 사서 먹여주라고 청탁했다.


유배 중에도 신앙·교리 전하다 선종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었다. 십자가의 길이었다. 수감 동안 여러 차례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범우는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하룻밤을 묵을 마구간에 들어가자마자 조용히 앉아 기도했다. 다음날 아침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범우는 언제 그랬냐 싶게 몸이 회복돼 사령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할 정도였다.

광주에서 출발한 김범우는 용인, 양성, 죽산, 충주를 거쳐 한양을 떠난 지 3일 만에 단양에 닿았다. 단양 군수는 읍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김범우의 정배소를 잡아놓고 누구도 허락 없이 그와 접촉하지 못한다고 오금을 박았다.

김범우는 정배소에서 얼마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령 외에는 누구도 만날 수 없었으나 한두 달이 지나면서 감시가 느슨해지자 인근 주민들을 접촉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유배지까지 찾아온 몇몇 교우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기도 생활을 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범우 토마스는 유배지에 가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종교를 실천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교리를 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벌의 후유증 때문에 쇠약해진 그는 같은 해에, 혹은 몇몇 다른 이들에 의하면 좀더 그 뒤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비록 토마스는 참수당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신앙인의 증거자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되다. 그는 처음으로 재판관들 앞에서 또 여러 형벌을 받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로를 지녔고, 뒤에 오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였으므로 그가 우리 순교자들의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우리에게 마땅하게 보인다. 불과 몇 해 전에도 단양의 나이 든 아전들은 외교인이면서도 여전히 존경심을 갖고 그에 대해서 말하곤 하였다.”(성 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2쪽 ‘김범우 행적'')


정확한 유배지와 매장지는

김범우는 경주 김씨 충선공파 62세손으로 아버지 김의서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 1751년 태어났다. 부인은 현재연의 딸 천녕 현씨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현계흠(플로로)의 사촌이다. 자녀로는 인구·인노·인기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역관으로 사역원 정(정3품)이었던 김범우는 조선의 중인 계급 안에서도 상류층을 차지하는 주요 역관 가문 출신이다. 33세에 세례를 받은 그는 35세 또는 36세에 선종했다.

1981년 김범우의 후손이 소장하던 호적 자료 9건과 편지 14통이 알려지고, 무덤이 발견되면서 그의 유배지가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부산교구는 일련의 정황을 토대로 1989년 9월 김범우가 밀양 단장으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전교하다 2년 뒤인 1787년에 순교한 후 그곳에 묻혔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는 김범우가 1785년 충북 단양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선종해 묻혔고, 이후 어느 때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하면서 이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김범우 약전 참조)

하느님의 종 김범우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주목받고 신자들에게 공경받고 있는 것은 이름이 드러난 신자 가운데 신앙 때문에 처벌을 받고 선종한 첫 번째 증거자이기 때문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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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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