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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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 아들의 선물

전진숙(아녜스, 제주교구 연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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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제미나이 제작


아침 출근길, 회사가 가까워지면 비행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비행기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바다도 보인다. 그렇다.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서 산다. 이주한 지 13년이 넘어간다. 이사를 하고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은, 연고가 있어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아는 이가 없이는 쉽게 올 수 없는 곳이 제주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구역 미사를 우리 집에서 드리면서, 가족을 만들어 주기 시작하신 주님의 계획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아들 라파엘은 33개월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아들에게 자연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해주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컸다. 십 년에 100㎞씩 수도권에서 멀어지면서 살면, 노후 걱정할 거 없다는 선배의 조언도 한몫했다.

결혼이 늦어져서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 드렸다. 늦었지만 짝을 만나게 해주시고 딸 요안나가 태어났다. 요안나가 13개월 되는 해에 남편이 2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혼자서 키우느라고 힘들었다. 아기들은 아프면서 자란다고 하지만, 호기심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TV 앞에서 흥이 나서 춤을 추다가, 무릎 위로 순식간에 TV가 떨어졌지만 무사했던 일, 저녁밥을 먹다가 갑자기 콘센트에 포크를 꽂아서 정전이 되었지만 감전되지 않았던 일, 친구들이 놀러 와서 배웅하고 현관문을 닫는 순간, 안겨 있던 딸아이가 문 사이에 손을 넣었지만 무사했던 일 등에는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연수가 끝나고 둘째를 가지려고 할 때는 두려움이 컸다. 5년이라는 터울 때문보다는 태몽이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넓은 들판을 걷고 있는데, 꽃들이 모두 시들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올라가다 보니 정상 위에 활짝 핀 꽃 무리가 있기는 했지만, 아이가 정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태몽이 아이의 미래를 모두 알려 준다고 믿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들 라파엘이 태어났다. 모두 정상이었다.

옹알이도 잘하고 눈 맞춤 역시 잘하던 아이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여름 캠프를 다녀 온 딸 요안나가 가족들에게 옮긴 유행성 결막염을 앓고 난 후였다. 아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라웠다. 아시시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특수교육기관을 구역 모임 중에 알려주셨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특수교육을 전공하셔서 가족, 특히 형제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방학 기간, 글짓기 지도를 해서 문집을 만들고 나눔을 했다. 딸 요안나의 글을 읽어보시고 수녀님께서 후원자들에게 보내주고 싶어 하셨다. 문집의 내용을 읽은 후원자들의 기부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 라파엘이 교육을 받는 내내 위로를 받았다.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자, 웃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많이 힘들지?’하는 주님의 음성을 느꼈다. 삶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와 아쉬움이 따르지만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잘했고, 잘하고 있다는 말씀이 들려왔다. “당신이 도우시면 살아나리이다”라는 시편 성경 말씀이 가슴에 꽂혔다.

올해로 아들 라파엘은 36살이 되었다. 자폐증의 증세는 다양하다. 의사소통의 장애, 의미 없는 반복적인 행동으로 또래 관계 형성을 못 하고 한정된 관심사에 몰두한다. 아들의 경우는 숫자에 집착했다. 그래서 집에 달력이 넘쳐났다. 매일 한 장씩 넘기는 365일 만년력, 탁상달력, 벽에 거는 달력 등 종류도 다양하다. 달력을 넘기면서 숫자를 보기 때문에 달력의 기능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발하러 가는 곳에서도 탁상달력을 넘기고, 문이 있는 곳은 다 열어 본 뒤에야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원하는 층으로 될 때까지 아파트 현관 출입구를 떠나지 못한다. 감사하게도 주민들께서 이해해주신다. 아들이 안 보이면 가족처럼 같이 찾아주시기도 하면서 환하게 웃으신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들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아들과 내가 바뀌어서 마음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주간활동센터 자원봉사 선생님이 떠오른다. 여름 캠프로 3박 4일 길게 지내다 오는 프로그램이 잡혀서 걱정이 앞섰다. 의사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아들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적어드렸다.

- 라파엘의 식습관은 선비기질이랍니다. 먹기 싫으면 굶습니다. 그렇지만 감자 앞에선 무너집니다. 선생님의 감자 반찬은 양보하셔야 할 거예요.

- 경직되고 땀을 흘리면 놀랐다는 뜻이랍니다. 깊게 안아 주시면 진정됩니다.

- 선생님의 귀밑머리를 넘겨드리면, 고맙다는 표현이에요.

- 밤에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베개를 뒤척여주시면 괜찮아집니다.

말로서는 소통할 수 없었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아들의 속내를 알 수 있어서, 캠프 기간 내내 행복했다고 하셨다. 아들로 인해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음이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심이 컸다. 그렇지만 아들이 아프지 않았다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두근 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를 봤다. 책으로 먼저 읽고 영화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소리로 답한다.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하다. 비극에서 낙천의 보석을 골라내는 작가의 통찰력을 배우고 싶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들로 태어나서 아들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제주의 바람은 어떻게 느껴질까. 수면 내시경까지 하면서 겨우 꺼냈던 감자탕의 돼지 뼈를 왜 다시 먹으려고 했을까. 탄력을 잃어가는 엄마, 아빠의 피부를 만져 보는 것은 슬픔을 표현한 것일까. 늘 해오던 틀로부터 훌훌 빠져나올 때의 홀가분함을 외면하는 마음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의 가족이어서 행복했을까.’

2년 전부터 아들 라파엘은 주간 활동센터에서 주간 단기 보호시설로 옮겨서 다닌다. 다른 이용인들은 2주에 한번 집에 오지만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오게 한다. 주간활동센터는 매일 집으로 오기 때문에 가족을 만날 수 있지만, 단기 거주시설은 4박 5일을 센터에서 있다가 주말에 오기 때문에 적응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마침 딸 요안나가 서울에서 짝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제주에 오기 전 분당성당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해서 청년 회장까지 하면서 봉사를 많이 했다. 동생이 자폐라는 것을 청년회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제주와는 달리, 분당성당은 장애주일학교가 운영되어 아들 라파엘이 성당에 마음 편히 갈 수 있었다. 주일이면 주보를 챙기는 것이 아들의 기쁨이었다. 그렇지만 청년회 회장을 할 때 모든 것을 지켜보던 청년이 딸의 배우자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 가족이 제주로 이주하여 지내는 기간, 사위가 될 청년은 결혼을 미루고 딸 요안나가 다시 서울로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동생이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결혼 상대를 만나는 데 생각이 많았던 딸이었다. 주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짝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면서 늘 함께 계심을 깨우쳤다. 요안나가 다시 서울로 가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아들 라파엘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단기 거주시설로 옮기게 하시고 적응하는 연습까지 하게 하신 주님의 치밀한 계획이 놀라웠다.

단기 거주시설에 입소한 후 월요일이면 오전 9시에 아파트로 셔틀버스가 온다. 창문을 통해 엄마·아빠를 쳐다보는 아들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아들을 보내고 다음 주 4박 5일분의 복용 약을 준비하면서, 늘 화살기도는 바친다는 남편이 종일 울적해했다. 부모가 점점 늙어가는데, 아들이 굳은 표정으로 가니깐 나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담임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양치질을 하고 나오다가 눈 옆을 다쳤다고 하시면서 사진을 보내셨다. 서둘러 비상약을 가지고 센터로 갔다. 의사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아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크게 다치지 않음에 감사를 드린다. 다른 이용인들은 2주에 한 번 집에 오지만, 매 주일마다 오게 하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아들보다 남편 베드로가 더 행복해한다.

작년에 남편 베드로가 신장암 수술을 받으러 갔다. 수술을 받기 전에 라파엘을 보여주려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아들 라파엘이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남편은 주님께서 만져주시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삶의 문제들은 늘 믿음을 시험한다. 두려움이 있을 때, 믿음으로 방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믿음에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짧은 한마디보다 아들의 손길이 기도였다고 한다. 원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간,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체험을 한 남편이 부러웠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확실히 익히게 해준 아들과 만나는 기쁨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고 한다. 어려운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기도하는 마음도 변화시키는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기도로 문제를 다스리는 삶보다 문제가 없는 삶을 원한다. 언제쯤 문제가 해결되나 이런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겸손한 마음을 자리 잡게 한 아들이 놀랍기만 하다. 언제나 문제 해결은 예수님이 하신다. 예수님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을 때, 물을 떠온 하인들은 알지 않았던가. 하인들이 안 것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 하인들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분인지 함께 기뻐하라고 하신다. 아들 라파엘의 손길로 두려움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깨닫고 나니, 아들이 자꾸 보고 싶다고 한다.

자녀의 상황이 어렵다고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면 대화가 안 된다. 문제만 생기면 삶 전체가 흔들리고, 쉽게 무너져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일상의 안정감은 기도하며 크고 작은 문제에 응답을 받고 계속 살 힘을 얻는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삶이 되면서, 구체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의 옷을 자주 구매하는 매장에 장애인 주차구역이 없어서 문의했다. 넓은 매장이어서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매장이 넓어서 장애인 주차구역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한 행정 담당자에게 장애인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가 되물었다. 그리고 장애인 주차구역이 설치되었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았을 때 오는 두려움에 담담해진다. 아무도 따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냥 판단하고 넘어간다.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지혜를 주신 주님이 놀랍다.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시간이 걸리지만 담담함과 담대함이 부어진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니 고난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려는 차분한 마음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 하루가 길었다.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들 때문에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빛나고 있는 내일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비록 고단하기는 하지만 마음의 틈새로 들어온 삶의 기쁨이 아들 라파엘이라고 주님께서 알려 주신다.

신이 다 돌볼 수가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우리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이 가족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기다림에 맡긴다. 그리고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 행복을 선택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삶을 잊고 살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니 감사로 모든 문을 열어 보라고 하신다. 따뜻한 기억을 만들어준 아들의 선물이 고맙다. 찬송가 1번 ‘나는 굳게 믿나이다’를 아들 라파엘이 틀어준다. 아멘!

 

전진숙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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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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