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과 권일신, 정약용, 이존창, 유항검 등 교회 지도자들은 미사와 성사를 통해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1786년 가을부터 가성직제도를 시행한다. 탁희성 작, ‘가성직제도’, 지본채색, 1988.
1785년 3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있은 후 여러 양반 집안에서 가톨릭 신앙에 심취해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초기 조선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이벽(요한 세례자)과 이승훈(베드로, 당시 29세)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아버지 이부만에 의해 집에 감금된 이벽은 그해 7월께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이승훈도 사랑방으로 끌려가 아버지 이동욱에게 ‘벽이문’과 ‘벽이시’를 짓고 앞으로 영원히 이단을 물리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자신의 신앙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달레 신부는 이때 조선 교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작은 양 떼의 신앙은 잠시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아주 꺼지지는 않았었다. 천주교인 집단이 그 교우 중의 몇몇이 배교함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겨 있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대부분 신자가 흔히는 재판관과 형리들의 박해보다도 더 참아 받기 어려운 집안 박해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다. 입교자 수는 늘어갔다.”(「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1쪽)
피정 통해 하느님과 만난 권일신과 조동섬
한양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박해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경기도 여주 한감개에 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당시 43세)이 초기 조선 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인도로 40일간 광야에서 머무셨던 것처럼 먼저 얼마 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조동섬(유스티노, 당시 46세)과 함께 경기도 양평 용문산의 적막한 절에서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야 신부가 쓴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년광익」(聖年廣益)에 적힌 대로 8일간 영신수련 피정을 했다. “그는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성령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동섬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피정 동안에는 내내 서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우리 주님과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에만 전심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하였음이 확실하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2쪽)
이승훈에게 위임된 미사·성사 집전 권한
이승훈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히고 아버지의 단속도 점차 옅어지자 즉시 교회 품으로 돌아왔다. 권일신, 최창현(요한, 당시 26세), 홍낙민(루카,당시 34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당시 29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당시 26세), 정약전(당시 27세)·약용(요한 사도, 당시 23세) 형제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교회 지도자들인 이들은 1786년 봄 한양 회현방 난동(오늘날 회현동) 정약용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을 더욱 쉽게 선포하고 새 영세 교우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선 성사를 받아야 하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북당에서 미사와 성사를 신부가 주례하며 자신도 사제로부터 직접 성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승훈의 말을 들은 교회 지도자들은 가톨릭 교리서 내용을 살펴보고 우선 ‘고해성사’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 교우가 다른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으나 서로 맞고해를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1786년 가을에 다시 모였다.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을 주제로 논의했다. 아무리 교리서를 뒤져봐도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뜻을 같이해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위임했다.
자발적인 교회 설립, 불가피했던 가성직제도
이승훈은 경기도의 권일신, 충청도의 이존창, 전라도의 유항검, 한양에 사는 정약전과 홍낙민 등 10명을 신부로 뽑아 임명하고 미사와 성사 집전 권한을 부여했다. 또 최창현을 비롯한 남녀 10여 명을 ‘부제’ 격인 ‘회장’으로 임명하고 교회 일을 돕도록 했다. 보편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기 조선 교회의 ‘가(假)성직제도’가 이렇게 1786년 가을에 수립됐다.
가성직제도에 대해 차기진(루카,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박사는 이렇게 평한다. “지도층 신자들은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 어린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새로 진리를 찾아 교회로 들어오는 예비 신자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순수한 목적에서 성직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혹 이것이 잘못은 아닌가’하는 의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교회, 선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서적을 통해 진리를 찾은 신앙 선조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특징이자 한계성이었다.”(「고난의 밀사」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