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은 ‘책임이나 죄를 없애 주는 조치나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사실 ‘대사(大赦, indulgentia)’가 잘못 번역된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대사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교회법 제992조 참조)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데요. 잠벌은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와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받는 벌입니다.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 대사’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데 왜 벌이 남아있는 걸까요?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벌은 고해성사를 통해 벗어나게 되지요.
반면 모든 죄는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도 가져오는데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항) 교회는 이를 생전에, 혹은 죽은 뒤 연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통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견디고, 또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속죄 행위들로 잠벌을 정화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잠벌을 정화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도움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받은 교회는 대사를 통해 그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대사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 대한 증서를 표현하자면 ‘대사부’가 바른 번역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면죄부’라는 오역이 생긴 것일까요? 대사가 남용됐던 역사에서 비롯한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에서 “연옥 영혼에게 벌의 면제를 전구의 방식으로 베푸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대사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 소리를 내는 즉시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오른다”고 설교하며 대사를 파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설교와 증서 발부로 인해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돈을 내면 죄가 사라진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면죄부’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최근에는 역사학계나 교과서 등에 ‘면벌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후 교회는 대사의 남용을 바로잡고자 트리엔트공의회 「대사에 대한 교령」을 통해 “대사를 얻기 위한 모든 부적절한 돈벌이들을 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전대사의 수를 줄이고 신자들이 전대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규범을 수정했습니다.
대사는 ‘면벌’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신심과 참회와 사랑의 행위, 특히 신앙의 성장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행위”를 북돋는 역할도 합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봉헌하는 것은 “탁월한 사랑의 실천이자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령 「대사 교리」 8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