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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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폭풍의 언덕」 : 사랑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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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순수성, 진실성, 열정, 헌신, 자유 등.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열정적인 사랑의 대명사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의 강렬함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1847년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당시 고딕 소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명확한 도덕적 시각이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흔하지 않은 깊은 사랑이 복수와 폭력을 감싸고 있어서, 빛과 어둠이 혼재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교회사 안에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던 경우들이 있다. “신이 원하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간 비극적 폭력을 낳았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 믿었다. 또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 등의 사건들이 있다. 교회는 과거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규범과 예의를 강조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남녀의 사랑은 절제되고 예의범절에 맞는 형식 안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규범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그리고 죽음도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힘 자체였다. 캐서린의 “나는 히스클리프이다”라는 말과,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영혼(캐서린)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서로를 자기 존재 그 자체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범적이고 문명화된 사랑은 이들의 결합을 담아낼 수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영원한 바위층과 같다”는 유명한 표현을 한다. 자신의 사랑이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거칠며 변하지 않는, 뭔가 근원적임을 보여준다. 이 사랑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거친 들판과 격렬한 날씨, 즉 폭풍의 언덕 같은 것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길들지 않는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캐서린의 죽음 앞에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도’ 좋으니, ‘어떤 모습’이라도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유령이 되어서 자신을 괴롭혀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심연에 홀로 사는 것보다, 유령에게 시달리기를 스스로 자청하며, 사랑이 무덤의 문턱을 넘어선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랑의 열정을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캐서린의 신체적, 심리적 무너짐과 히스클리프의 평생에 걸친 고뇌와 잔혹한 복수의 주된 원인으로서 파괴적이며 광적인 집착이다.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해 버리자, 사랑은 복수로 변한다. 3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사법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담보, 부채, 결혼 계약을 이용해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해 버린다. 결국 힌들리는 과거에 어린 히스클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하인처럼 전락해서 완전히 파멸한 채 절망 속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에 향한 히스클리프의 집착…복수를 ‘사랑’으로 정당화해 절망·파멸 자초


평화로 충만한 사랑 이루려면 폭력 멈추고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를 폭력이나 죄로 생각하지 않고, 근원적 질서를 바로 잡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와 캐서린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 엮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이 에드거를 선택한 일은 사회의 계급과 재산 구조가 강요한 부당함으로 느끼기 때문에, 복수의 폭력과 잔혹함은 캐서린의 결혼이 무너뜨린 존재론적 사랑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는 정의로 포장된다.


히스클리프에게 사랑과 복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복수는 사랑의 연장선이다. 복수는 상대방에게 고통 자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받은 고통을 드러내고 알리기 위함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심장을 부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그녀의 심장을 부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심장도 부서졌다”고 말한다. 즉 복수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파괴는 바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캐서린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복수에 의해 겪는 고통을 통해, 그의 고통을 깨닫도록 기대된다. 복수는 과거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말한다,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어. 내가 그녀에게 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있을 거야.”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길이 결국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복수를 사랑의 행위로 정당화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히스클리프는 계획했던 복수를 거의 다 이루었음에도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소진되어 버리고, 만족과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제 그는 ‘기와 한 장 들어 올릴’ 힘도 없고, “그들을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털어놓는다. 복수가 그의 존재를 충만케 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집어삼켜 버렸다.” 자기 기만적이며 파괴적 집착으로 포장된 그의 사랑은 결국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렸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태복수법이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구약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심지어 이런 형태의 복수는 부모들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과거에 힌들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헤어튼의 교육을 박탈해 버리고, 캐시에게 자신의 병약한 아들과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히스클리프가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끝 무렵 캐시와 헤어튼에게서 캐서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이 관계를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와 치유를 향해 나아간다. 두 사람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태도 변화는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점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열정적인 사랑의 깊이는 예의범절과 사회계급이 중요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분명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히스클리프의 폭력은, 19세기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잔인함과 폭력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자기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신분과 물질적 욕망 때문에 에드거와 결혼해 버린 캐서린을 용서하지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이다. 죽음조차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 용서가 없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결국 집착과 복수와 자기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의 사랑은 실망과 상처를 피해 갈 수 없다.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적인 관계의 지속이 아니라, 평화와 충만감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단어가 지겨워지지 않아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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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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