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먼저 도착한 초고령사회는
우리에게 믿음과 우려를 동시에 준다.
그 믿음으로 안심하고,
그 우려를 발판 삼아 미래를 설계하면
우리의 초고령사회 안착에도 도움
작년 한 해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은 단연 장강명 작가가 쓴 「먼저 온 미래」다. 「먼저 온 미래」는 일반 세상보다 이르게 AI 시대를 맞이한 바둑계 이야기로, 현장을 관찰하고 전문가를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내가 겪을 AI 시대를 우려하는 한편 기대도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뀐 지금 ‘오늘이 AI가 가장 어리석은 날이다’(AI가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므로)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노년에 대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는 이른바 ‘먼저 온 노년’을 경험 중이다. 한동안 나에게 미래란 곧 노년을 의미했고, 그래서 갓 중년에 들어선 내가 마치 노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때도 있었다. 책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은 일본 사회에 먼저 온, 노인 인구 증가 시대 이야기다. 책에는 노년과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힌 21세기가 나온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은 갖가지 방법으로 살길을 찾고 있었다. 다 살길이 있다더니, 그 옛말이 딱 맞는다.
1부 ‘예고된 미래, 초고령사회의 신풍경’을 보면 이제 사회가 노년 국민에게 맞추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노년이 개인의 일이었다면, 일본은 이제 노년 인구 1/3 시대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풍경을 함께 창조했다. 느긋하고 느린 노인을 위해 편의점에 슬로우 계산대를 도입한 것, ‘치매 머니’라 불리는 치매 고령자의 노후 자산 안전을 위해 가족신탁, 성년후견인 제도를 마련한 것 등이 그것이다. 혼자 늙는 노인에게 치매가 오면 본인의 자산을 본인을 위해서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평균적으로 노인 네 명에 손주 하나인 요즘 사회를 위해 ‘손자의 날’을 만든 것 또한 매우 인상 깊었다. 손주에게 돈을 쓰고 싶어하는 애틋한 마음, 그 마음을 헤아려 마음껏 돈 쓸 날을 만들어 준 것이다.
2부 ‘유쾌한 시니어가 온다’가 액티브 시니어를 지향하는 시니어 개인 차원의 일이었다면, 3부 ‘간병의 품격’은 본격적으로 사회가 팔을 걷어붙인 이야기다. 자동 배설처리장치·비데형 기저귀 등 배설 케어에 기술을 도입하고 있고, 고령자 폐렴 발병의 주된 원인인 구강 위생을 관리하고자 적극적 구강 케어에 도전한다. 시범적이고 느린 발전이 될 수도 있겠으나 늘 그렇듯 시작이 반이다. 그리고 어쨌든 모두 노년 당사자가 느끼는 치명적 곤란함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4부 ‘시니어 비즈니스’는 노년 시대의 선진화를 다룬다.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차에 탄 채로 약을 수령하면서 복약 상담을 받는 드라이브 스루 약국, MZ 세대와 고령자를 친구로 묶어 청년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고령자에게는 생활에 직접적 도움을 주는 ‘못토 메이트(베스트 파트너)’ 서비스, 주 고객층을 시니어로 맞춘 편의점 등이 그것이다. 편의점 강국 일본은 치매 노인 긴급 보호·간병 센터·조제 약국 등 접근성 향상이 우선인 일들을 역시 편의점을 거점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드라이브 스루 약국의 도입은 너무나 환상적인 일이다. 아흔 살 노인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 진료를 다닐 적에 모든 일은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병원 1층 로비 바로 앞에 정차해도 어머니의 걸음 속도로 자동문이 있는 정문까지 가려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휠체어를 태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긴 시간이 걸렸다. 종합병원도 개인병원도 어머니와 함께라면 3m, 5m가 100m쯤 되는 듯 식은땀이 났다. 동영상을 2배속으로 보는 세상인데 나만 로딩이 걸린 기분이랄까. 그러니 약국은 보호자의 일, 돌보는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어머니도 약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약사도 환자 본인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산더미였을 텐데. 약국 방문은 꿈 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동네 병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진료실 문을 열고 환자 자리까지 걷는 데 하세월이 걸릴 우리 어머니를 보자마자, 의사는 벌떡 일어나서 바퀴 달린 의자를 덜덜 밀며 문가로 왔다. 그리고 신속히 어머니를 앉혀 1초 만에 책상 앞으로 밀고 갔다. 지역 소도시에서 노인 환자를 많이 살펴본 다정한 의사였다. 많이 보면, 많이 겪으면 방법이 생긴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실버 산업은 돈이 되는 일이다. 수가 많고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산업군이 그러한 눈으로 노년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다정한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시장이다. 시장 경제의 논리에 기대서라도 노년을 위한 이런저런 다종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길 바란다. 똑똑한 한국인의 머리와 빠른 한국인의 몸으로 그런 것쯤은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말대로 일본이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 먼저 온 초고령사회는 분명 우리에게 여러 믿음과 우려를 함께 줄 수 있다. 그 믿음으로 안심하고 그 우려를 발판 삼아 미래를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분명 우리의 초고령사회 안착에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