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념일에 나름의 방식으로 정성을 담아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선물은 선물 마련의 수고에 견줄 수 없는 행복을 부여한다.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위한 의례적 선물과 주고받기로 조합된 거래적 선물도 있지만, 진정한 선물은 신뢰를 전제로 형성된 ‘관계의 결실’이다. 이 선물은 선물 자체로 그 가치를 판정할 수 없다. ‘사물’(무엇)이 아니라 ‘관계’(누구)가 표출되는 선물은 멀리서도 가깝게, 대면하지 않아도 보이게 하는 만남을 구현한다. 곧 선물은 ‘관계 유지의 표지’다.
신앙을 전제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술하는 성경은 ‘하느님의 선물들’을 열거한다. 선물과 유사한 용어가 법률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함축하는 ‘계약’이다. 옛 계약은 율법을 통해,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립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다. 관계 유지의 실태를 ‘의로움’으로 표명하는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화 : 로마 5,1 참조)을 역설한다.
‘물을 통한 하느님의 심판’(창세 7,7 참조)을 언급한 성경은 척박한 대지에 샘솟는 ‘물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탈출 17,6 참조)도 제시한다.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한 에덴동산(창세 2,10-14 참조)으로부터 첫 인간이 추방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물 부족 지대에서 유목하다가 정착하였다. 생존의 필수 요건인 식수 확보가 가능한 샘·우물·호수·강 근처에 인구가 밀집되어 마을이 조성되었다. 지역민이 우물에 대한 지분을 선점하더라도 방문객에게 우물물을 제공하는 행위는 당연한 처사였다.(1열왕 17,10 참조) 한 사마리아 여인이 ‘조상 야곱과 관련된 시카르 고을의 우물’(창세 33,18 참조) 부근에서 방문객 예수님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소개된 ‘목마르지 않은 물’로 인해 ‘야곱의 우물’(하느님의 선물)이 재조명된다.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선물을 사물로 대하듯, 목마르지 않은 물 혹은 생명수(묵시 22,17)를 ‘특별한(신령한) 물’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유의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하느님의 선물을 대상화하는 태도다. 영성체 예식에서 신앙인은 ‘빵과 포도주’(사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관계)를 먹고 마신다. 복음과 천국은 내용이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만남) 유지 상태다.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요한 4,14) 하는 생명수는 ‘어떤 물’(무엇)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누구)이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숨을 거두기 직전 예수님의 두 발언은 “목마르다”(19,28)와 “다 이루어졌다”(19,30)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의 목마름은 부재한 듯 여겨지는 ‘아버지에 대한 갈증’이고, 아들의 성취감은 현존하여 함께 있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다. ‘아들 예수님’에게 목마르지 않은 물은 ‘아버지 하느님’이다. 시편은 시냇물을 향한 암사슴의 그리움을 은유로 이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42,2-3) 우리의 목마름은 ‘물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