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0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잘못된 성사 집전에 대한 통회, 북경 선교사의 용서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2) 가성직제도 3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이승훈이 1789년 윤유일을 통해 북경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의 프랑스어 번역본.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를 펴낸 샤를 달레 신부는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 신부들의 활동을 이렇게 평했다. “그 시대의 기록에는 이 성사들에 대해서만 말이 있다. 이 목자들이 준 세례는 확실히 유효하여 재생의 은총을 주었다. 그들이 준 다른 성사는 무효였음도 물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의 성직 수행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을 전파함에 새로운 충동을 주었음은 확실하다. 그때 천주교인들이 열광적이었다는 것과 예절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는 데에 거룩한 열성을 가졌었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다.”(상권 324쪽)

달레 신부는 또 성직자로 활동하던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 즉시 모든 성사 집전과 성직 수행을 중지한 것을 두고 감탄했다. “모든 신자 앞에서 그런 직위에 올랐다가,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그들의 신앙은 진실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위험을 당하기는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5~326쪽)


북경에 간 윤유일, 선교사에게 이승훈 편지 전달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1787년(정미년) 봄 가성직제도를 중단한 지 2년여 만인 1789년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북경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지체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북경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또 1787년 음력 10월 한양 성균관 아래 동반촌 김석태의 집에서 이승훈과 정약용, 강이원이 은밀히 기도하면서 교회 서적을 공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남인 벽파는 서학을 더욱 맹렬하게 사학(邪學)으로 배격하고, 홍낙안이 이 사실을 정조에게까지 알렸다. 이를 ‘정미반회사건’이라 한다.

이승훈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북경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추진했다. 유항검과 몇몇 교우의 도움으로 마침내 경비를 해결했다. 그리고 이 일의 적임자로 권일신이 추천한 윤유일(바오로)을 낙점했다. 그제야 이승훈은 명주 천(어떤 자료에는 비단이라고 함)에 깨알같이 글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 속에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제기했던 이의 글도 동봉했다.

29살 청년 윤유일은 은 20냥으로 동지사 수행단의 마부 자리를 얻어 북경으로 갔다. 윤유일은 1790년 1월 30일 북경 북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를 찾았다. 하지만 이승훈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그라몽 신부는 광동으로 떠나고 없었고, 예수회로부터 선교지를 이관받은 라자로회 선교단장 로 신부가 그를 맞았다. 윤유일은 들키지 않기 위해 옷 속에 꿰매어 숨겨왔던 편지를 로 신부에게 줬다.


구베아 주교의 답장 들고 조선으로

편지에는 조선에 교회가 세워져 세례받은 신자가 1000명이 넘고 이들을 위해 이승훈 자신이 신부들을 임명해 성직 제도를 운용하다가 잘못된 것임을 뒤늦게 알고 중단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승훈은 이 일을 ‘통회’하는 고백문을 적었다.

“저는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으니, 저는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제 발로 마귀의 종이 되어, 성사를 집전하는 일까지 손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잃도록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제가 저지른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아! 저를 용서해 줄 곳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엔들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를 기꺼이 기다려주신 저 무한한 자비에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제가 어디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자료집」 제1집 253쪽)

로 신부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 신앙 공동체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구베아 주교의 지시에 따라 이승훈을 비롯한 조선 교회 신자들의 질문에 답장을 써 윤유일에게 줬다. 로 신부는 이 편지에서 평신도들이 함부로 성사를 집전한 것은 교리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관대하게 용서했다. 그러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라고 권유했다. 아울러 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윤유일은 1790년 2월 북경을 떠나 음력 4월 한양에 도착했다. 이승훈을 비롯한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윤유일이 가져온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와 로 신부의 편지를 읽고 그때부터 성직자 영입 운동에 들어갔다.


교회에 순명한 초기 지도자들

3회에 걸쳐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제도에 관해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초기 조선 교회 젊은 지도자들이 교회 서적을 통해 자신들의 성직 활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그 즉시 중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 교회 성직자들에게 직접 가서 물어봤다는 점 역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혈기만으로 교회를 꾸려간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식별’을 위해 ‘교회에 의탁’했고, 또 ‘교회에 순명했다’는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나주 윤 율리아 등 교회에 순명하지 않고 교우들에게 그릇된 신심을 퍼뜨려 현혹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조선 교회 젊은 지도자들이 갈구한 것은 순수히 성체성사를 비롯한 일곱 성사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교회 서적을 통해 영적 예배의 성사적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성사 갈망과 구원을 위한 ‘올바른 식별’은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께서는 기도 안에서 지혜와 믿음, 식별의 은총을 주신다. 이 식별의 은사로 신앙의 빛에 조명되어 신비를 뛰어넘어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북경의 선교사 로 신부는 조선의 새 교우들을 나무라지 않고 성사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3-1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3. 20

마태 10장 32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