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 시인의 특별하고 평범하게] (12) 둘째가 느낄 돌봄의 책임

어느 날 둘째가 아내에게 문득 했다는 말. “엄마, 괜찮아요. 마음껏 죽어도 돼요.” 둘째가 아내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다. “언니는 내가 키울 수 있으니까 마음 편히 죽어도 된다고요.” 도대체 이 말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아냐, 언니는 엄마 아빠가 키울 거고, 다 큰 다음에는 자립하게 될 거야. 네가 키울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왜 자꾸 죽으라고 그러는 거야?” 아이는 부모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한 고집이다. “언니는 귀엽단 말이야! 나는 언니가 좋아.”
아이의 엉뚱한 말에 우리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언니를 사랑한다는 말에 감동도 받았지만, 아이가 언니에 대한 부담이나 책임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죽음은 언제나 두렵다. 누구든 피할 수 없고, 언제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부모에게는 그 공포가 한 스푼 더한 것 같다. 장애인의 부모가 종종 한다는 말.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장애인의 돌봄이 오로지 그 부모와 가정에 맡겨질 때, 죽음은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죽음 뒤에 남겨질 일이 떠올라 편히 눈감기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에 비해 길거리와 대중교통 등에서 장애인을 쉽게 볼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특별히 장애가 덜 발생하는 건 아닐 테고, 그들이 가정이나 시설에 머물기에 그러할 것이다. 장애인 활동 지원 제도, 긴급돌봄 서비스, 지역 사회 통합돌봄 등의 복지 정책이 이러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지의 사각지대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고, 복지 정책으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모두 지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때 치료를 진행하기 위한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심리적 불안감이나 우울 증세 또한 무시할 게 못 된다. ‘정상성’에 대한 갈망이 큰 우리 사회의 분위기, 그 분위기가 불러오는 편견은 이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나는 아이보다 하루 더 살고 싶지 않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를 것이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면 좋겠지만,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아이가 나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다운증후군 할머니가 되어 주변 사람에게 더 많이 웃어주고 친절을 베풀며 살면 좋겠다. 그 나이의 녀석에게도 돌봄은 필요하겠지? 그걸 역시 할머니가 되어 있을 둘째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죽고 나면 쓸모없을 고민이겠지만, 죽기 전까지 머리가 지끈거릴 일이다.
자매가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요즘 부쩍 사이가 좋아져 흐뭇하다. 그러나 잠시 후에 들려오는 비명. “왜? 무슨 일이야!” 언니가 배가 아팠는지 욕조 밖으로 나가려다 결국 실수하고 말았단다. 질색하며 흐르는 물에 몸을 닦는 둘째가 말한다. “아무래도 내가 언니를 키우긴 어렵겠어. 아무리 귀여워도 이건 아니잖아!” 그래, 당연히 그렇지. 아내가 아이들의 몸을 닦아준다. 나는 옷을 입기 기다렸다가 머리를 말려주었다. 우선은 그저 이 순간을 살아내야지 생각하면서. 죽음은 저 멀리 치워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