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의 혼인 잔치’를 시작으로 일곱 표징을 배열하는 요한 복음은 ‘죽은 라자로의 소생’을 마지막 표징으로 소개한다. 이 표징 때문에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45-57 참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11,3)이며 “친구”(11,11)인 라자로를 살린 표징에서 예수님의 ‘눈물’(슬픔)이 눈길을 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우는 장면(루카 19,41 참조)과 대조하여, 예수님은 죽은(잠든) 친구 때문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져’(11,33 참조) “눈물을 흘리셨다.”(11,35) ‘예수님이 참 하느님’(1,1 참조)임을 도입부터 주창한 요한 복음은 눈물을 통로로 ‘예수님이 참 인간’임을 공표하였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흙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나 흙으로 돌아가듯”(집회 41,10)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자연의 이치다. 인간의 죽음은 의학적 관점에서 심폐 혹은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로 정의된다. 그리스도교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죽음을 이해한다. 신앙 언어의 고유 의미가 일상 언어와의 혼용으로 인해 곡해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데, 대표적 예가 죽음이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은 세상 창조 후 ‘세상 밖에서’ 방관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이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라는 전례 문구가 이를 표명한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업적에 대응하여, 슬픈 숙명인 피조물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요청된다. 성경은 첫 인간의 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도한다.(로마 5,12 참조) 죄는 일차적으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과의 ‘친교 거부’이며, 그 결과인 죽음은 ‘단절 상태의 연속’(하느님 밖)이다. 반면 생명은 ‘하느님 안’에 있는 상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죽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부연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 안’(무덤)에 갇힌 인간을 ‘생명 안’(부활)으로 해방하였다.(에페 2,5 참조)
인간은 ‘죽음 전’(이승)과 ‘죽음 후’(저승)의 분리에 익숙하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산 이들(생명)의 하느님’은 ‘죽음 안’(어둠/거짓 속)에서 ‘생명 안’(빛/진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망진단이 내려진 망자가 ‘생명 안’에 있을 희망을 제시하는 사후세계 교리는 ‘생명’(하느님 안)과 ‘죽음’(하느님 밖)의 경계에 선 이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죽음 후 생명 안’(천국)에 있기 위해 ‘죽음 전 생명 안’(사랑)에 있기를 재촉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라자로를 무덤(죽음 안)에서 나오게 하였듯, 태초부터 ‘생명 안’(아버지 안: 10,38 참조)에 있는 예수님은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 곧 ‘생명 안’(아들 안: 3,15 참조)을 선사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죽고 묻히셨으며, ‘참 하느님’으로 부활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