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바오로)은 조상 제사와 신주를 금하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 일로 그는 조선 교회 첫 순교자가 됐고, 조선 왕조는 100년 넘게 가톨릭교회를 사회 질서를 해치는 역도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윤지충 복자화.
이승훈(베드로)은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행사를 위해 1790년 9월 떠나는 사신단 일행에 윤유일(바오로)을 다시 한 번 북경으로 보냈다. 이승훈은 북경 교회 선교사들에게 쓴 서한 한 통과 함께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 이미 모시고 있는 신주들을 계속 모셔도 되는지를 선교사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윤유일에게 당부했다.
당시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청년 지도자들은 아우구스티노회 오르티즈 신부가 1705년 간행한 한역 서학서 「성교절요」(聖敎切要)를 통해 가톨릭교회가 유교식 조상 제사 거행을 금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상 제사와 신주를 모시는 것에 관해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답을 듣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답은 단호했다. “교황청 결정에 따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황청은 클레멘스 11세 교황 칙서 ‘이날로부터’(Ex illa die, 1715)와 베네딕토 14세 교황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 1742)에 따라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세상을 떠난 조상의 이름과 죽은 날을 적은 나무패인 ‘신주’ 또한 금지했다. 신주에 조상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 서한을 들고 1790년 10월 북경을 떠나 귀국했고, 제사와 신주 금지령은 그해 11월에서 1791년 1월 사이 조선 교회 전체에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양반 출신 신자 일부가 교회를 떠났고, 남아있는 이들은 이 일로 박해를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구베아 주교의 금지령 따른 윤지충과 권상연
1791년 10월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살던 윤지충(바오로, 32세)이 그해 음력 5월 어머니가 선종하자 고인의 유언에 따라 상복을 입지 않고 두건만 쓴 채 장사를 지내고 조문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 위패도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또 그는 앞서 교회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그 재를 집 뜰에 묻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두었다. 이종사촌 권상연(야고보, 당시 42세)도 그의 결정을 따랐다.
이 사실을 안 친척과 지인들은 윤지충을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 비난했고,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정조는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이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각각 충청도 광천과 한산으로 몸을 숨겼으나 그들 대신 숙부가 잡혀 관아에 끌려가자 자수했다. 이때가 1791년(신해년) 10월 중순께였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고,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윤지헌(프란치스코)의 형이다. 윤선도가 그의 6대조이고, 윤두서가 증조부다. 또 정약전·약종·약용 형제와 고종사촌 간이다.
그는 24살 되던 해인 1783년 봄 진사에 급제했다. 1784년 겨울 한양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 등 가톨릭 서적을 읽고 신앙에 눈을 뜬 후 1786년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를 대부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어머니 권씨와 아우 윤지헌, 이종사촌 권상연을 입교시켰다.
혹독한 문초 견디며 신앙 고백
전주 감영으로 압송된 윤지충은 살이 터지는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유를 전라 감사 서유린에게 다음과 같이 담대히 진술했다. “사대부 집안에서 신주를 세우는 것이나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하게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그는 또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다”고 신앙 고백을 했다.
전주 감사 서유린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최후 진술과 함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이 지엄하다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두려움 대신 신앙의 기쁨 전하며 순교
사형 선고를 받은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치 잔칫집에 가듯 흥겨워하면서 군중들에게 큰소리로 가톨릭 교리를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면서 칼을 받고 순교했다. 이렇게 윤지충은 조선 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윤지충의 시신은 순교 9일 만에 전주 감사의 허락을 받고 수습됐다. 그의 시신은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었고, 겨울임에도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했다. 그의 시신은 10개월 뒤 1792년 10월 12일 유항검이 소유하고 있던 전주 초남이 바우배기로 이장됐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의 행동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사회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진산사건’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일로 조선 왕조는 그리스도인들을 전통과 사회 질서를 거역하는 역도로 여겨 100여 년간 박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