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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금지’ 가르침 따르고 순교로 신앙 고백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4) 권상연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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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연 복자화. 권상연(야고보)은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과 함께 고모인 윤지충의 어머니 안동 권씨 부인의 유언과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 일로 그는 윤지충과 함께 조선 교회의 순교자가 됐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바오로)이 제사와 신주를 금하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어머니가 선종하자 제사를 폐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버려 이 일로 체포돼 참형을 당했다. 교회에서는 이를 ‘진산사건’ ‘신해박해’라 하고,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가 됐다.

이 일에 연루된 이가 바로 권상연(야고보)이다. 그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안동 권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787년 무렵 고종 사촌인 윤지충에게 「천주실의」, 「칠극」을 빌려 읽고 가톨릭 신앙에 눈뜨게 됐다.

권상연이 누구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웠고 또 세례를 받았는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린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의 복자 권상연 약전에서 밝히듯 권상연은 윤지충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다음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정설로 전해진다. 하지만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이었던 고 김진소 신부는 권상연이 가성직제도 아래 전라도 담당 신부로 활동하던 고종 사촌인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8살이나 나이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블뤼 주교가 권상연과 윤지충을 ‘동반자’라고 표현할 만큼 둘은 친밀했다. 장년인 40세에 순교해 ‘청년 주역’을 소개하는 이 연재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만, 진산사건을 제대로 알려면 권상연의 행적을 살펴야 하기에 이번 호에 싣는다.


구베아 주교 지시 따라 유교식 제사 거부

윤지충이 권상연보다 앞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 유교 전통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것은 권상연이 먼저였다. 권상연은 이미 진산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전인 1790년께 조상 제사 금지를 명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지시에 따라 보관하고 있던 신주 4개를 한꺼번에 불태웠다.

권상연이 저명한 유교 가문 출신임에도 가톨릭교회 가르침에 따라 누구보다 먼저 조상 제사를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아마도 그의 고모이며 윤지충의 어머니인 안동 권씨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권기징의 맏딸인 그녀는 1724년에 태어나 1791년 67세로 선종했다. 그녀는 34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윤지충을 낳았다. 그리고 40대 후반에 남편을 여의고 임종 때까지 과부로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윤지충과 조카 권상연을 불러 자신의 장례를 치를 때 절대로 어떠한 미신 행위나 우상숭배 같은 행위를 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제사도 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들 셋이 유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유는 윤지충의 옥중 수기와 공술 자료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째, 가톨릭교회가 금지하는 일이었다. 둘째, 가톨릭교회 교리에 따르면 제사와 신주는 헛된 것이다. 셋째,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사대부의 예법을 어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기존 질서에 맞서 신앙 고백한 순교자

권상연은 윤지충과 함께 1791년 10월 중순께 자수해 그해 12월 8일 전주 남문 형장에서 윤지충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전주 감사 서유린은 권상연과 윤지충의 최후 진술과 함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권상연과 윤지충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지 않고, 형구에 묻은 피가 조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조광 교수는 권상연과 윤지충의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들의 죽음을 천주교의 특수 용어나 감성에 국한하거나, 순교의 의미를 교회라는 폐쇄된 공간에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들의 죽음을 단지 유교 사회에서 조상제사를 거부한 죄목에만 연결해 이해해서도 안 된다. 조상제사 거부는 이들이 삶으로 고백했던 신앙의 일부였다. 이들을 향한 조선 정부의 형 집행은 궁극적으로 천주교 공동체가 드러내는 새로운 사회와 희망을 겨냥했다.”

권상연과 윤지충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기준을 터득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당시 최고 권위인 국왕의 권위를 상대화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둘은 국왕의 명령과 조선 사회의 체제 질서를 거부하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순교자가 됐다. 이렇게 둘은 조선 교회의 순교자가 됐다.


오늘날 교회는

20세기 들어 제사 금지에 관한 교황 가르침은 바뀌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훈령 「중국 의식(儀式)」을 통해 조상 제사를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 문화의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해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시신이나 무덤, 죽은 이 사진(영정)이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리는 행위 등은 허용한다. 하지만 위패에 ‘신위’ 또는 ‘신주’라는 글은 쓰지 못한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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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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