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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서적 필사·성직자 영입에 투신한 순교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5) 윤지헌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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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헌 복자화. 윤지헌(프란치스코)은 진산사건으로 형 윤지충과 이종 사촌 권상연이 순교한 이후 고산 저구리로 이주해 전라도 지역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형 윤지충 따라 가톨릭 신앙 받아들이다

18세기 중·후반 영·정조 시대는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적용되던 시기였다. 이때 가톨릭 신앙이 조선에 전래했고,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예교주의를 표방하던 조선의 정치 세력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진산사건 주모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을 참수해 본보기로 삼았다. 이를 한국 가톨릭교회는 ‘신해박해’라 부른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형 윤지충에게 교리를 배웠고, 1787년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다.

윤지헌은 형 윤지충과 달리 처음에는 가톨릭 신앙에 호의적이진 않았다. 형 윤지충이 1784년부터 그에게 여러 차례 가톨릭 신앙을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가톨릭을 이단으로 여겨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178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더불어 그는 진산사건으로 형 윤지충과 이종 사촌 권상연이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 제사 거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는 1795년 주문모 신부와의 만남에서 잘 드러난다. 주 신부가 제사를 지내는지 묻자 그는 “죽은 이를 산 사람같이 섬기는 것은 우리의 예법”이라고 답해 주 신부에게 책망을 들었다.

하지만 윤지헌은 숙부이자 양부인 윤징(尹?)이 1797년 정사박해 때 사학죄인으로 체포돼 죽임을 당하자(주-윤징은 정사박해 순교자 8인에는 포함되지 않음) 교회 가르침대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세우지 않았다. 그는 1801년 체포돼 심문 과정에서 윤징의 제사를 폐한 이유에 대해 천당과 지옥에 관한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신주를 세울 필요도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다고 증언했다.


호남 지역 신앙 공동체 일군 한약방 주인

윤지헌은 진산사건 이후 더는 고향에서 살수 없게 돼 전라도 고산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해 한양을 비롯해 지방 곳곳에 판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황심(토마스)을 북경 교회에 보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는 등 교회를 지원했다.

윤지헌이 양반임에도 한약방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윤덕렬부터 아버지 윤경까지 약방으로 생계를 꾸렸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서적을 약상자에 숨겨두고 궁벽한 산골 고산 저구리로 숨어들어와 스스로 양반 신분을 포기하고 평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신앙의 자유와 성직자 영입, 복음 선교를 위해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분주히 살았다. 그가 필사한 교회 서적은 한양과 지방으로 널리 퍼졌고, 유항검·관검 형제가 소장한 가톨릭 서적 대부분이 그의 것이었다. 또 그는 무안 사람 고시윤, 고산에 사는 양해주, 안무산, 박군원, 김광적, 한응천, 유순철, 김용이·김요 형제, 진산 사람 목서중, 금산 사람 김종우, 박맹손, 영광에 사는 윤종백, 강진 사람 윤제현, 진산 출신 박춘지, 정산 사람 김방통이 등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줬다.

더불어 1795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홍산에서 고산 저구리로 이사해 오면서 어느새 고산 저구리 윤지헌의 집은 전주 유항검의 집과 함께 전라도 지역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됐다.

이를 증명하듯 「순조실록」 원년(1801년) 4월 25일 자는 “전라 감사 김달순이 계문하기를, 도내의 사학 죄인 유항검·관검 형제와 윤지헌, 이우집은 요사하고 황탄(허황)하여 스스로 윤리와 기강을 단절하고 많은 무리를 모아 호남의 거괴(거물급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최창현, 황사영, 윤지충, 이존창의 무리와 난만하게 화응하고(화답하고 응하여), 주문모를 아비처럼 섬겨 맞이하여 머물러 있게 하였다”며 윤지헌을 호남 지역 가톨릭 공동체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대박청래’ 시도 발각돼 순교

한편 1794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성직자 영입을 위해 ‘대박청래’(大舶淸來) 추진을 제안했다. 대박청래란 서양의 큰 배가 조선으로 와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멈추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압력을 가해달라는 내용이다. 당시 조선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주 신부의 제안에 따라 “대박=선교사=신앙의 자유”라는 인식을 하게 됐고, 조선 임금을 회유해 우호 조약을 맺고 자연스럽게 성직자를 영입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윤지헌은 1795년 봄 고산 저구리에서 주 신부를 뵌 후 자주 상경해 현계흠(플로로), 강완숙(골룸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대박청래’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는 북경 교회에 보낼 밀사로 황심(토마스)을 추천하기도 했다.

윤지헌은 이종 사촌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관검 형제와 유중태, 최창현(요한)과 함께 서명한 ‘대박청래’ 청원서를 1796년 겨울 황심의 편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냈다. 이 청원서의 초안은 주문모 신부가 작성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황심이 가져온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는 대박청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신부를 잘 보필하고 선교에 힘쓰라고 적혀 있었다.

황사영 체포로 ‘대박청래’ 사건이 발각되면서 윤지헌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돼 붙잡혔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전주로 이송, 그해 10월 24일 37세 나이로 순교했다.

신유박해 때 ‘대역부도’로 능지처사에 처해진 순교자는 윤지헌, 황사영(알렉시오), 유항검·관검 형제 넷뿐이다. 이들 모두 ‘대박청래’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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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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