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세계를 이해했으면…사람의 삶은 돌봄이 있어 이어진다.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나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었다. 성장이 끝난 후에 잠시 독립하는가 싶었지만 위로 아래로 다시 돌봄을 주고받고 있다. 한쪽을 향한 돌봄이 끝나면 다른 한쪽에서의 돌봄이 시작된다. 결국 내가 돌봄을 받는 시기도 올 것이다. 이게 돌봄의 순리인지 돌봄의 굴레인지, 세상은 사랑스럽기도 의심스럽기도 하다.
내 첫 책 「연애(緣愛)-아흔 살 내 늙은 어머니 이야기」는 돌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와 돌아가신 내 시어머니는 마흔다섯 살 차이가 났다. 사는 내내 어머니는 젊은 며느리의 마음을 돌보고, 젊은 며느리는 나이 든 어머니의 몸을 돌봤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함께 살며 어머니를 모신 적이 없으니 나는 그저 돌봄의 세계를 맛보기 한 수준이다. 어디 가서 어머니를 돌봤다고 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 시절 내 인생에는 어머니뿐이었다. 먼 곳에 떨어져 살면서 때마다 어머니 집에 들르고 어머니에 대해 이것저것 챙기는 것만으로도 내 머릿속과 내 휴일은 온통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입원이라도 하시면 틈틈이 전화와 카톡을 붙잡고 살고, 휴일에는 병원으로 내달리고, 끼니는 가볍게 먹거나 거를 때도 있었고, 몸이 고단하니 감기와 장염을 수시로 앓았다. 나도 모르게 애를 쓰고 사는 것, 그것이 돌봄이었다.
이은주 작가의 「돌봄의 온도」는 돌봄의 모든 것에 관한 책이다. 작가는 아픈 동생을 대신해 조카들을 돌봤고, 이제 조카 손주를 돌보며 동시에 어머니를 돌본다. 그리고 번역가인 동시에 직업으로서 요양보호사 일을 한다. 작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안팎으로 돌봄을 지속 중이다. 작가의 삶 자체가 바로 돌봄이다.
그리고 본인을 돌본다. 작가는 문학을 통해 본인의 마음을 돌본다. 이것을 돌봄과 문학이라 했다. 어머니에게는 돌봄 받는 이가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고 정보를 준다. 이것은 돌봄 받는 능력이며 반대로 돌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을 가족들에게 전한다. 바로 돌봄의 기술이고 이것은 돌봄 민주화를 위한 행동이라고 했다. 돌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다. 작가의 글을 읽고 있자니 돌봄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돌봄에는 중독성이 있다. 멈추기가 어렵고 점점 소모된다. 내가 어머니를 돌볼 적 내 몸 피곤한 줄 모르고 애썼던 것은 중독되어서였다. 나도 모르게 삶을 돌봄에 내어 준 것이다.
그러니 돌볼 때의 우리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 적정 온도를 지켜야 한다. 나는 「돌봄의 온도」에서 ‘적정하다’라는 형용사를 떠올렸다. 이 책은 적절한 온도를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돌봄이라는 단계를, 돌봄이라는 행동의 적정선을 찾도록 노력하자. 왜냐하면 우리 모두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자식을 키운 세대와 자신의 삶도 중요하다고 교육받은 세대와 오직 자신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세대의 조합이 오늘날 총천연색 돌봄으로 나타나고 있다.” 책을 통틀어 이 부분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나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자식을 키운 1세대와 자신의 삶도 중요하다고 교육받은 2세대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은 당연히 3세대일 것이다.
1세대도 아니고 2세대도 아니고 1.5세대쯤 되는 나에게 그리고 지금 부모를 돌보느라 애쓰는 다른 1.5세대들에게 이 책은 꼭 필요하다. 돌봄의 세계에서 낀 세대인 나는 모든 세대를 이해한다. 1세대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2세대가 왜 그렇게 사는지 3세대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두 안다. 그래서 낀 세대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나는 부모의 노후 돌봄이 자식의 책임이 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작가의 전작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만난 돌봄 대상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작가는 돌봄 대상자들을 남자의 경우 ‘제우스’ 여자의 경우 ‘뮤즈’라 불렀다. 그래서 당연히 본인은 ‘신’들의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아흔 살 즈음의 시어머니 이야기로 첫 책을 쓴 나도 내 시어머니를 ‘뮤즈’라 불렀다. 나를 글 쓰게 만들었으니 내 시어머니는 나에게 뮤즈였다. 영감을 주고 쓸 동력을 주는 뮤즈. 작가는 돌봄 대상자들을 신을 모시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자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뭉클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해석한다. 작가의 세계 속 신들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다양한 이름과 역할과 서사를 갖고 있듯이 돌봄 대상자 한 명은 바로 하나의 세계다. 그걸 은유적으로 ‘신’이라 표현한 것 아닐까. 꿈보다 해몽 같을 수 있지만 늘 인생은 그럴듯한 해몽이 있어 살 만하다. 인간의 마지막에는 나의 세계를 닫아주는 누군가의 돌봄이 동반된다. 그 귀한 일을 하는 세상의 모든 돌보는 이들이 적정한 온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중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