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준 신부의 철학 상담] (65) 감정
치유는 관계 재구성에서 시작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 감정의 통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사유되어 온 주제다. 이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학파가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절제하고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아타락시아’, 즉 ‘영혼의 평정’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스토아학파는 표상에 대한 통제를 통해 ‘정념’을 극복함으로써 ‘아파테이아’, 즉 ‘무정념(無情念)’의 상태를 지향했다. 물론 이들이 다스리고자 했던 것은 슬픔·고통·공포·욕망·부적절한 쾌락 등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정념들이다.
감정은 어원적으로 ‘정념’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파토스(π?θος)’와 라틴어 ‘파시오(passio)’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동적으로 겪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영어 ‘emotion’은 라틴어 ‘movere(움직이다)’에 ‘e-’(밖으로)가 결합된 ‘emotio(움직여 나감)’에서 유래하여, ‘밖으로 움직여 드러나는 정서적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감정은 ‘수동적으로 겪는 상태’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정서적 운동’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감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수용 능력인 ‘감성(sensibility)’이 전제되어야 하며, 감각적 지각이 선행될 때 비로소 ‘느낌’이라는 감정 상태가 형성된다.
서구의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는 이성을 가장 우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여 감정을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폄훼해 왔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서 인간은 이성적 사유 못지않게, 혹은 그에 앞서 감정에 크게 의존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근원적인 감정에 따라 타자와 동화되거나 타자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감정을 단순히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으로 환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고대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잘못된 표상과 가치판단에서 비롯된 ‘정신의 오류’로 간주하고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았으나, 근대의 흄은 감정을 도덕 판단의 근거로 삼아 도덕 감정에 기반한 ‘공감 윤리학’을 제안했다. 셸러 또한 감정을 이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가치를 직관하는 능력으로 보았으며, 공감이나 사랑과 같은 감정은 이러한 가치 직관의 구체적 양태로 이해될 수 있다.
짐멜은 감정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동력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한편으로는 직접적이며 비매개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결속과 대립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형식의 매개를 통해 지속성과 객관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감정은 사회적 관계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직접성과 매개성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형식들을 산출하는 생성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질투는 제3자의 개입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배타적 삼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긴장의 정서적 표현이며, 시기는 비교와 차이를 전제한 상호작용의 형식 속에서 형성되는 긴장의 정서적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은 맹목적인 내적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형식이 작동할 때 그 형식의 내적 진실이 정서적 형태로 표출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때 감정의 치유는 특정 감정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감정을 산출하는 상호작용의 형식을 성찰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관계 속의 긴장을 완화하고 새로운 거리와 균형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