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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밀사로 조선에 첫 성직자 모셔온 순교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8) 지황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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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황(사바) 복자화. 지황은 우리 땅에 사제를 처음으로 모셔온 인물 중 한 명으로 사제를 위해 제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참 그리스도인이다.


복자 지황(池璜, 사바, 1767~1795)은 윤유일(바오로)에 이어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북경교구에 파견한 두 번째 밀사이다.

‘지홍’으로도 알려진 그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톨릭 신앙이 1784년 조선 땅에 전래된 직후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지도자들은 1789년 이래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조언에 따라 성직자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1791년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으로 박해를 받아 그해 있었던 첫 번째 성직자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1793년 북경교구를 통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한다. 최인길(마티아, 복자)·최필공(토마스, 복자)·손경윤(제르바시오, 복자)·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복자)·강완숙(골룸바, 복자) 등은 북경을 두 차례 다녀온 윤유일을 중심으로 지황과 박 요한을 밀사로 선발했다.


선교사에게 박해 상황 전달·주문모 신부 인도

지황과 박 요한은 조선 연행사(燕行使)에 끼어 북경으로 갔고, 윤유일은 의주에 남아 성직자가 조선 국경을 무사히 넘어올 수 있도록 의주에서 준비했다.

명나라 말기 북경에 남당(南堂)이 세워진 이후 청나라는 동당(東堂)·북당(北堂)·서당(西堂)을 차례로 건립했다. 성당을 짓는 데는 황제들의 도움이 컸다. 선교사들이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땅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동당은 순치제가, 북당은 강희제가 자신의 학질을 고쳐 준 폰타네 신부에게 내린 땅에 지어졌다.

지황과 박 요한을 만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그들에게 ‘조건부’ 세례와 견진성사를 줬다. 구베아 주교는 특히 지황의 굳건한 신앙심에 감복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지황으로부터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의 박해 상황을 듣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복자)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지황과 박 요한은 조선 연행사에 끼어 귀국길에 올랐고, 주문모 신부는 단독으로 산해관을 거쳐 국경으로 갔다. 중국 봉황성 변문에서 만난 이들은 의심받지 않기 위해 지황과 박 요한은 연행사 일정대로 먼저 귀국하고, 주 신부는 이들이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변문에 남아 있기로 했다.

국경을 넘은 지황과 박 요한은 연행사 일행에서 빠져나와 의주에서 윤유일을 만나 상황을 보고하고, 지황은 다시 국경을 넘어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날이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의 안내로 12일 만에 한양 계동 최인길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교자 밀고로 내려진 ‘주문모 신부 체포령’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설립 10년 만에 성직자를 모시게 됐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그들은 주 신부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샤를 달레 신부,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78쪽 참고)

하지만 한영익의 밀고로 입국 6개월 만에 주문모 신부의 신원이 탄로 났다. 한영익은 가톨릭 교리를 배우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교회를 떠난 인물이다. 진사였던 그는 가톨릭 신자인 여동생으로부터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밀입국해 사목 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한영익의 여동생은 정약전·약종·약용 형제의 서제(庶弟) 정약횡의 처였다.

1795년 6월 27일(음력 5월 11일) 여동생의 주선으로 주문모 신부를 만난 한영익은 곧바로 국왕의 친위 조직 별군직에 근무하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동생 이석에게 주문모 신부의 용모와 계동 최인길의 집 위치를 알려줬다. 이석은 이 사실을 영의정 채제공에게, 채제공은 정조에게 곧바로 알렸다. 정조는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주문모 신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오도록 명했다.

포졸들이 최인길의 집을 습격했을 때 주문모 신부는 피신하고 없었다. 포졸들이 닥치기 전 먼저 정조의 지시 아래 비밀리에 진행된 주 신부의 체포 작전을 최인길에게 알린 이가 있었다.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주문모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배교했던 한 무관이 알려왔다”고 했다. 윤민구 신부와 정민 교수는 다산의 「자찬묘지명」 내용을 근거로 이 무관이 바로 ‘정약용(요한 사도)’이라고 주장한다.


성사의 은총 전하고자 성직자 대신 체포돼

주문모 신부를 후동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시킨 최인길과 지황, 윤유일은 주 신부 대신 체포돼 포도청에 끌려갔다. 그리고 셋은 다음날 새벽에 처형돼 강에 버려졌다. 이때 지황의 나이 28세였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를 을묘년 주문모 신부 체포 실패 사건이라 해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 줄여서 ‘을묘사건’, 또 장소를 가리켜 ‘북산사건’이라 부른다.

지황은 우리 땅에 가톨릭 사제를 처음으로 모셔온 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40일간 북경에서 생활하며 미사와 조건부 세례, 견진과 고해를 통해 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체험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를 통해 조선 교우들이 받을 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사제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놓았다.

지황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주님 말씀을 실천한 청년 그리스도인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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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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