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흔적들은 오롯이 몸에 남는다.
가족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인 그들은 인생살이의 베테랑이었고,
노쇠한 몸은 베테랑의 몸이었다.
어릴 때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대문 옆에 행랑채가 있었다. 본채와 떨어져 있는 행랑채는 창호지를 바른 문에 쇠로 된 문고리가 달려 있었고 겨울이면 방이 절절 끓었다. 바로 옆 작은 부엌에는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는 까맣고 큰 솥이 있었다. 거기에 옥수수가 삶아지기도, 그냥 물이 끓기도 했는데, 항상 그 앞에는 머릿수건을 쓴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불을 지피면서 동시에 가만가만 무언가를 씻고 삶고 찌고 건졌다. 할머니는 늘 그곳에 앉아 우리를 위한 먹거리를 만지셨다. 말하자면 그곳은 할머니의 베이스 캠프였다.
할머니가 가장 자신했던 먹거리는 단연 꼬막과 바지락이었다. 바다가 지척인 남쪽 마을, 할머니는 평생 갯벌에 쭈그리고 앉아 굴·바지락·꼬막 등을 까고 낙지를 잡았다. 말년에 할머니의 다리가 고장 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말년이 아니라 더 일찍, 노년도 아니고 중년부터 할머니의 다리는 진즉 고장이 나 있었다. 구부리고 펴고 구부리고 펴고. 남들의 몇백 배, 몇천 배 일했을 할머니의 다리 관절들. 그리고 바닷바람과 바다 햇살에 그을고 두꺼워지고 거칠어진 피부. 노동의 흔적들은 오롯이 할머니의 몸에 남았다.
희정 작가의 책 「베테랑의 몸」은 일의 흔적이 고스란히 몸에 남은 베테랑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공사·조리사·로프공·어부·조산사·안마사·마필관리사·세신사·수어통역사·일러스트레이터·식자공·배우.
무서운 파도, 바다의 두려움을 다섯 남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겨낸 어부 부부가 있다. 30년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몸이 굳을 정도로 버티고 섰던 그들은 이제 노인이 되었다. 버티고 구부리고 펴고 끌어올리고. 30년 이어진 뱃일은 낡은 관절과 함께 그들의 몸에 고이 새겨졌다. 살림을 하다가 급식실로 가서 베테랑이 된 조리사가 있다. 무거운 식재료를 번쩍 들어 올렸던, 뜨거운 음식 조리 열기에 땀을 비 오듯 흘렸던, 시간에 쫓기며 서서 밥을 먹었던, 그 시간을 잘 달래가며 그녀는 30여 년을 보냈다. 그리고 인터뷰어에게 “살림은 기획이다”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1년에 4000명의 몸을 밀었으며 4000명의 몸을 본 세신사가 있다. 그녀는 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의 몸을 풀어주어 다시 인생을 살아갈 기운을 주었다. 세신 받은 이들을 살게 한 노동의 흔적은 자신의 손발에 그대로 남았다. 물과 세제와 목욕 용품 등의 합은 손과 발을 갈라지고 터지게 했다. 다른 베테랑들의 이야기도 하나같이 모두 내겐 눈이 부셨다. 저마다 본인의 베테랑 인생을 잘 살아냈고 또는 잘 살아내고 있고 그 흔적을 가진 몸으로 나이 들어간다.
열두 명의 몸과 열두 명의 베테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 할머니의 다리를 생각했다.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하여 무엇이건 지키고자 한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것은 책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자 내 할머니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농사를 짓는 것이, 갯벌에 나가 굴을 따는 것이 제일 정직하게 수확물을 주는 것을 알기에 그 시절 내 조부모들은 일하고 또 일했다. 그들은 인생살이의 베테랑이었고 그들의 노쇠한 몸은 베테랑의 몸이었다. 그리고 책 속 베테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 할머니도 본인의 베테랑이 된 몸을 직업에 대한, 인생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항상 못생기고 맛있는 과일을 따다 주셨다. 아니면 낡고 무딘 칼로 무언가를 깎아주셨다. 이를테면 생고구마·생밤 그런 것들. 여름이면 옥수수를 삶아 주셨고 겨울이면 바지락을 까서 국을 끓이거나 꼬막을 삶아 하나하나 까주셨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모두 음식인 이유는 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우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가 잘하는 것은 바로 본인의 노동으로 식구들을 건사하고 음식을 챙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많이 나이가 들었을 때조차 할머니는 내 밥을 챙기셨다. 본인이 챙겨주지 못하면 먹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도 하고자 했다. 그렇게 끝까지 본인이 잘하는 일을 하고자 하셨다. 그것은 할머니의 자부심 자체였다.
새벽녘에 닭소리·새소리·짐승들 소리에 행랑채에서 눈을 뜨면 이미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을 한 바퀴 돌고 온 할머니께서 문을 열며 말했다. “민선이 일어났냐? 옜다, 이거 묵어라.” 할머니는 무심한 듯 툭 잘 익은 홍시를 넣어 주셨다. 그걸 본 막내 삼촌은 “민선이만 입인가 봅소.” 웃으며 그런 말을 잘도 던졌다. 그랬던 삼촌은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고 그랬던 할머니는 이제 여기에 안 계신다.
모든 노년의 몸은 베테랑의 몸이다. 그러니 자부심을 갖고 노쇠한 몸을 기특해하고 아껴 줄 일이다. 그리고 한 번의 인생을 살고 나서 베테랑의 몸으로 노년을 맞은 이들을 아껴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베테랑이 존경을 받는 이유와 같은 이유이다.